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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푸른 별

이케다 사부로지 & 카와니시 사콘

르멩 @LEUMENG

 

관련 묘사가 많지는 않으나, 심해 공포증이 있거나 바다 묘사에 두려움을 느끼시는 분은 열람 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티없이 맑을 하루에 내게로 와

바람보다 시원한 파도를 띄워줄게

끊이지 않는 여우비에 달이 그리운 날이면

우주를 집어삼킨 짙푸름을 보여줄게

 

 

 

세상이 물에 잠기던 날, 사콘은 푸른 존재를 보았다. 고층 빌딩을 집어삼킨 해일이 하늘마저 가리고, 새까만 밤풍경에 빗방울은 별처럼 쏟아지고, 모두가 그로부터 등을 돌려 달아나던 종말의 날. 그 당시 사콘은 막 글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아이였다. 어른들과 발맞추어 달리기에는 작고 약했으므로 어머니의 품에 안겨야 했고, 그 덕에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다. 검고 짙고 어두운 광활에 유일하게 빛나던 푸르름을. 하늘을 베틀에 얹어 견고히 자아낸 듯 가늘고 실낱같던,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던 환상을. 물살에 뒤섞인 채로 제게 손을 뻗는 듯하던 바다의 형상을. 가장 맑고 깨끗한 파랑을 한데 모아 투명하게 탄생시킨 것처럼, 형용할 수 없이 찬란한…….

 

사콘은 아직도 간혹 그 장면이 꿈은 아니었을까 의심하곤 했다. 물론 꿈이라 쳐도 악몽이긴 했다. 그리움에 취한 채로 회상하기엔 현실이 끔찍하도록 여전했기에 도저히 그 기억을 사랑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아주 가끔은, 다시 그 빛을 눈에 담을 수 있기를 소망했다. 동경할 만한 걸 보고 싶어서. 뼛속까지 시리도록 반짝이는 걸 좀 보고 싶어서. 이 세상에 남은 빛이라고는 미세먼지에 잠긴 희미한 태양과 구조 요청을 하겠답시고 매일 밤 우주를 향해 쏘아대는 거대한 조명 따위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해양도시는 고립되어 있다. 말이 도시지, 땅덩어리가 대부분 물에 잠겨 남은 문명도 없었다. 운송과 통신은 다 끊기고 고철만 남은데다 물자는 당연히 한정적이다. 타 행성으로 떠나는 이주선에 올라타지 못한 사람들이 죽기살기로 몰려든 이 곳은 한때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불렸다고 한다.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너무 추워서 꼭대기 등반은 꿈도 못 꿨다고 하던데, 지금은 지구 유일의 생존 가능 지역이자 최후의 피난지가 되었으니 기묘한 일이다. 어른들이 종종 한숨 섞인 목소리로 회상하는 '대홍수' 이전의 세계는 사콘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색채를 띠고 있었다. 새파란 하늘과, 새파란 바다와, 봄, 여름, 가을, 겨울. 지저귀는 새와 길짐승, 싱그러운 활엽수, 길가에 핀 잡초와 들꽃. 일 년 내내 눈이 내리는 곳과 일 년 내내 푸르른 곳. 알 게 뭐람. 사콘은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속으로는 투덜거리곤 했다. 정말 알 게 뭐람. 어차피 자신은 평생 모를 풍경일 텐데.

 

어른들은 항상 바빴다. 희망을 잃지 말자며 거주 구역을 보강하거나 둑을 쌓거나 전파를 잡기 위해 애를 썼다. 이따금 아이들에게 수학이며 의학이며 사회학 따위의 공부를 가르쳐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개중에는 회의론자도 상당수 섞여 있었지만, 적어도 어린아이에게까지 염세를 드러내진 않았기에 사콘은 다들 쓸데없이 희망차다고만 생각했다. 그놈의 구조 신호가 감감무소식인 지 벌써 몇 년 째인데. 태어난 이래 주욱 한결같았던 정말 세상이 변하기나 할까. 매일 똑같은 일상에 질린 사콘은 거주 구역을 벗어나지 말라는 어른들의 권고를 종종 어겼다. 몰래 바리게이트를 빠져나가고 둑을 넘어 바닷가로 향할 때에는 그나마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빙하 녹은 물이 대부분이었기에 사실 바다보다는 민물에 가깝긴 했지만 어쨌든 바다는 바다였으니. 저 너머 어딘가에 자신이 찾는 이상향이 존재할 거라는, 착각인 줄 이미 알고 있는 상상에 사로잡혀 있다 보면 금방 해가 졌다. 그러면 또다시 그 좁아터진 골목으로 돌아가야 했다.

 

 

"어디 다녀온 거니?"

"그냥 뭐, 요 앞에요."

"위험하니까 멀리 나가지는 마, 알지?"

"알아요."

 

걱정 어린 잔소리의 끝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믿는다는 말이었다. 대체 뭘 믿는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사콘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저녁 식탁에 앉았다. 식단이든, 잠자리든, 생활 자체든, 하루하루 살아남기에 급급한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어찌어찌 불평을 참을 정도는 됐다. 애초에 사콘은 '정상적인' 사회를 겪어본 적이 없었으니 비교할 대상도 존재하지 않았고, 아쉬운 티를 낼 때마다 부모님이 자신의 머리를 쓰담으며 미안하다 속삭이는 것도 화가 나도록 싫었다. 그래서 일부러 더 태연한 척 굴었다. 해소되지 않는 갑갑함을 달래려 바닷바람을 삼켰다. 얇은 벽 너머로 각종 기계들이 요란하게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마무리하던 열한 살의 어느 밤, 세상은 영원히 이렇게 해안에 갇혀 소리소문 없이 사라질 듯 싶었다. 해가 뜨기 전까지는.

 

 

 

 

비가 오던 날이었다. 원칙대로라면 사콘은 호우 경보가 울린 순간부터 비가 그치고 수습이 어느 정도 완료될 때까지 방공호에 피신해 있어야 했다. 비가 내리면 물이 언제 어떻게 불어날지 알 수 없고, 사콘은 보호 우선순위 대상에 포함되는 나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호우를 예상치 못했으므로 예외였다. 해도 나름 쨍쨍했고, 습하지도 않았고, 예보에도 비가 올 거라는 말은 없었다. 방파제에 부딪쳐 사그라드는 파도를 먼발치서 지켜볼 즈음에도 하늘은 맑았다. 그러다 대뜸, 생각지도 못한 시점에 가느다란 여우비가 내리기 시작한 거다. 피부를 간지럽히듯 아주 가볍게. 사콘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에 빗방울이 들어올까봐 양손으로 손그늘을 만든 채였다. 손등에 빗줄기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고, 해수면에는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돌이켜보면 그 '대홍수' 이후로 빗속에 들어와 있는 건 처음인 것 같다. 비가 오면 항상 대피소 깊숙한 곳에서 얌전히 기다려야 했으니까.

 

이 정도는 맞아도 상관없지 않을까, 뭐 비가 많이 오는 것도 아니고. 어른들이 걱정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잠깐 정도는 괜찮겠지. 괜히 들뜨는 기분에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조심 걷는다. 콘크리트와 흙과 모래가 불규칙적으로 섞인 해안은 걸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디선가 밀려왔을 문명의 잔해가 방파제에 걸려 있는 걸 잠시 지켜보다가, 사콘은 기시감을 느꼈다. 비닐이나 플라스틱 따위라고 생각했던 새파란 물체에서 미묘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단순히 물방울이 맺혔다거나 햇살이 반사된다거나 하는 느낌의 빛이 아니라 좀 더 근원에서부터 화사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이질적인 발광. 자연의 색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지만 동시에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도 없을 것 같은…. 그 빛이다. 사콘은 숨을 들이켰다. 그날 해일 틈으로 제게 손을 뻗었던 맑고 투명한 형광빛. 그 푸른색. 바다다. 경외감에 발이 굳는다. 반쯤 꿈인 줄 알았던 기억이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는 거다. 두려움만큼이나 호기심이 강하게 차올라 한 걸음을 딛어본다. 푸른 물체는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킨다. 사콘은 잠시 주춤했다가, 다시 다가갔다. 방파제 바로 앞에서 조심조심 목을 쭉 뺀다. 푸른 물체가 고개를 든다.

 

자연의 아름다움. 언젠가 어른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사콘은 공감하지 못했다. 어딜 둘러보나 칙칙함뿐인 세상인데 아름다움이라니, 말도 안 되는 표현 아닌가. 그러나 이제와 눈앞의 파랑을 바라보면서는 그 두 단어를 곱씹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연의, 아름다움. 아무리 용을 쓴다 해도 감히 대적하지 못할 청량함. 푸른 존재는 어른들이 '옛날'을 그리워하는 이유를 단번에 납득시켰다. 아주 오래 전 바다는 이런 빛깔이었을 거다. 에메랄드를 얇게 풀어놓은 듯 눈부신 거품을 온몸에 두르고, 열대어가 살 것 같은 녹색 머리칼을 짤막하게 늘어뜨리고, 형체 없는 물안개처럼 부드러운 몸짓으로 빗방울을 받아들이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엥?"

 

사콘은 푸른 존재의 상체가 사람의, 그것도 제 또래 어린아이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걸 한 박자 늦게 인식했다. 기대만큼 점잖지도 몽환적이지도 않고 외려 까불까불하게 제게 알은체를 하고 있는 것도 말이다. 멍하니 눈을 꿈뻑인다. 방파제를 사이에 둔 터라 거리가 제법 멀었지만 적어도 상대가 요란을 떨고 있다는 거 하나는 확실히 보였다. 잠시 꿈을 꾸듯 붕 뜨던 기분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가라앉고 현실감이 그 자리를 메운다. 사콘은 조금이라도 더 선명히 보기 위해 발돋움을 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푸른 존재는 더 신나게 손을 흔들었다. 반응이 기꺼운 모양이었다.

 

"…뭐야?"

 

사콘이 멀거니 상황을 파악하는 동안 푸른 존재는 낑낑대며 방파제를 넘어 사콘에게로 다가왔다. 바다에 이어진 몸체는 미끄러지듯 살랑살랑 움직였지만 빠르지는 않았다. 그것만 해도 기묘한데 인간이 만든 구조물에 가까워질수록 답답하다는 듯 표정을 구기기까지 했다. 그렇게까지 하며 제게로 향하는 이유가 대체 뭔지, 사콘은 추론을 포기하고 그냥 물어보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겁보다는 충동에 못 이기는 성향이다.

 

"너 누구야?"

 

폭 내뱉은 말에 상대는 방파제에 매달려 헥헥대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뭔가를 설명하려는 듯 입을 뻥긋거렸다. 손을 휘적일 때마다 물보라가 일었다 사그러들고, 몸체에 고인 파도는 그 결을 따라 일렁인다. 언젠가 빈 소라껍데기를 귀에 대어보았던 순간처럼 잔잔하면서도 깊은 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사콘은 본능적으로 그 소리가 바다의 언어임을 깨달았다. 해수의 신비를 감히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나지막하게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이름 정도는 따라 발음해볼 수 있었다.

 

"…사부로지?"

 

사콘이 떨떠름하게 확인하자 푸른 존재, 사부로지는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사콘을 가리키고 어깨를 으쓱해보인다. 소개를 요구하는 듯한 모양새에 얼떨결에 대답한다.

 

"나는 사콘. 카와니시 사콘이야."

 

사부로지가 만족스럽게 웃는다. 사콘은 그제야 긴장이 풀려 온갖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대체 정체가 뭔지, 제게 하고 싶은 말은 또 뭔지, 사람인지 요물인지, 살아 있는 생물인 건 맞는지 물어보는 족족 사부로지는 그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능청스레 시선을 피했다. 입모양을 달싹거리기도 했으나 파도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궁금한 게 산더미인데 말이 통하지 않는데다 상대가 비협조적으로 나오기까지 하니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다. 침착하게 대화를 이어가려던 인내심은 머지않아 바닥난다. 결국 사콘은 신경질을 냈다.

 

"아, 뭐 어쩌자는 건데!"

 

다시 파도소리.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거세다. 사부로지는 억울하다는 듯 씩씩대다가 방파제 아래로 쏙 들어가버렸다. 평소 방파제 사이에 빠지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누누이 들어온 터라 사콘은 식겁하며 소리를 쳤다.

 

"야! 미쳤어? 위험해!"

 

그러자 사부로지는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화를 내는 것도 같고 잘난 체를 하는 것도 같은 표정으로 뭐라 전달하려 하다가 다시 사라진다. 뒤늦게 상대가 바다라는 데에 생각이 닿는다. 바다에게 바다에 빠지는 일이 위험할 리 없다. 사콘은 그제야 안심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방금 뭘 본 거람. 감각을 의심하기에는 너무 생생한 상호작용이지 않았나. 되짚어볼 새도 없이 등 뒤에서 자신을 찾는 목소리가 들린다. 아차 싶었다. 해안까지 나왔다는 걸 들키면 곤란하질 게 뻔하므로 사콘은 서둘러 거주 구역 쪽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비는 어느 샌가부터 그쳐 있었다.

 

사람들 틈으로 돌아오자 바다에 다녀온 게 꼭 꿈처럼 느껴졌다. 사콘은 옷깃에 남아 있는 물내음을 움켜쥐고 꿈이 아니었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이대로 잠들었다가는 오늘 하루가 휘발될 것만 같아서였다. 아침이 되면 꼭 다시 찾아가서 확인해보겠다고 다짐하며 잠에 든다. 그러나 다음 날, 숨을 몰아쉬며 달려간 해안은 텅 비어 있었다.

 

사부로지를 다시 만날 수 있던 건 한참이나 지난 뒤였다. 며칠째 지속된 장마에 진절머리가 난 사콘이 잠시 비가 그친 틈을 타 거주 구역 밖으로 몰래 산책을 나갔던 날이었다. 평소 사람들이 지나다니던 길가까지 물이 차올라 바다가 코앞이었고, 인기척 하나 없는 도시는 폐허처럼 조용했다. 그 망망대해를 멀거니 바라만 보던 사콘은 원인을 특정할 수 없는 허무와 상실을 느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 정도 못 붙이고 언젠가 탈출할 수 있을 거라는 미약한 희망만 품으며 하루하루 버텨나가는 생활은 누구에게든 소모적일 테니까. 무력감에 쪼그리고 앉아 수면에서 물장난을 치는데, 갑자기 얼굴로 물이 튄다.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자 옆에서 보글보글 소리가 들린다. 사부로지였다.

 

어안이 벙벙해 눈만 깜빡이는 사콘에게 사부로지는 다시 물을 튀겼다. 물이 물을 만지는 게 기이해서 멈칫한 것도 잠시, 사콘은 누가 장난을 친다고 가만히 당하고만 있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이를 악물고 같이 물을 튀겼다. 물론 상대는 온몸이 물이었으니 별 효과는 없었다. 소리 없이 깔깔대는 사부로지 탓에 약이 잔뜩 오른 사콘은 뭐 이겨먹을 방법이 없을까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자 근처에 널브러진 나무토막 따위가 눈에 들어온다. 대충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주워들고 확 던져버리자 사부로지의 몸에 물결이 일었다가 사라진다. 당황한 듯 표정이 변한다. 그러나 곧바로 짜증이 났는지 아예 물을 퍼부어댄다. 사콘은 질세라 바쁘게 이것저것 던져댔지만 결국 홀딱 젖고 말았다. 삿대질을 해가며 쓸데없이 힘을 다 뺀 뒤에야 사부로지는 혀를 웩 내밀며 사라졌고, 사콘은 분한 마음을 삭히지도 못한 채 감기로 고생해야 했다.

 

그 후로도 몇 번이나 이어진 사부로지와의 만남은 늘 그런 식이었다. 비가 오는 날에 해안으로 나가면 푸른빛을 뽐내며 사콘을 기다리고 있다. 말 한 마디 없이 장난을 걸고, 똑같이 되받아치면 화를 냈다가 웃기도 하고, 그러다가 비가 그칠 때쯤 제멋대로 가버린다. 처음에는 어이도 없고 귀찮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묘하게 비 오는 날이 기다려졌다. 아무도 모를 세상의 비밀을 혼자 간직한 기분도 들고, 일탈을 하는 것도 같고, 아무튼 지루하진 않았으니까. 즐거웠다. 설레고, 들뜨고, 물론 신경질도 나지만, 신이 나고. 거의 태어날 적부터 불안 속에서만 살아야 했던 사콘에게 기대감은 아주 낯선 감정이었으므로 그만큼 중독성이 있었다. 그러나 비가 올 때 거주 구역 밖에서 돌아다니는 건 쉽지 않았다. 슬그머니 빠져나가려다가 들키는 일이 잦아질수록 사콘은 산책은커녕 어른들과 계속 붙어 있어야 했다. 거짓말이 늘어난 건 차라리 별 거 아닌 일이라고 생각했다. 유일한 낙을 빼앗겨 한순간에 하루하루가 침울해진 거에 비하면 말이다.

 

"사콘, 또 어딜 가려고?"

"아, 어디 안 가요."

"저번에도 그랬잖아. 비가 올 때는 위험하다니까?"

"지금 안 오잖아요."

"잠깐 그친 거야. 조금만 더 기다리자, 응?"

 

잔소리에 지친 사콘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구석에 가서 등을 돌리고 누웠다. 걔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성질머리 보니까 친구도 없어 보이던데. 내가 그랬던 것처럼 해안가에 혼자 웅크리고 앉아있진 않을까. 다음번엔 꼭 이기겠다고 으름장도 놨는데 지금쯤 콧방귀나 뀌고 있진 않을까. 설마 이대로 영영 못 만나는 건가. 그건 진짜 싫은데. 흐릿한 상상이 감은 눈꺼풀 아래로 퍼져나간다. 담요를 머리끝까지 덮어씌우고 잠든 척이나 하려 했는데 정말로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밤이 되어 어른들이 돌아와 있었고, 도란도란 소리 죽여 나누는 말소리가 들렸다. 사콘은 최대한 깨어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귀를 쫑긋 세웠다. 어른들의 대화를 엿들을 기회는 정말 흔치 않기 때문이다.

 

"…파란 빛… 바다에서…."

"……요새 수위가, …이대로 가다간…."

 

파란 빛? 설마 그 푸른 존재를 말하는 건가? 그게 뭐 어쨌다는 건지 잘 들리지 않아서 사콘은 은근슬쩍 담요를 귀 아래로 내렸다. 그러나 기척을 내지 않으려던 노력은 이어진 문장에 깨지고 말았다.

 

"…도시를 물에 잠기게 하려 한다는 소리세요? 그 파란 형체가요?"

"소문이라는 게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잖아요."

"무슨 말도 안 되는…."

 

그쯤에서 사콘은 저도 모르게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냈고, 어른들은 하던 말을 멈췄다. 일어난 거냐고, 편하게 자라고 자신을 안아들어 옮겨주는 품이 따뜻했다. 익숙한 이부자리에 뉘어져 온몸이 노곤하게 늘어졌으나 사콘은 잠에 들 수 없었다. 생각이 멋대로 뻗어나가 심장 박동을 키운다. 파란 형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사부로지를 말하는 게 아닌가. 사부로지가 도시를 물에 잠기게 할 거라고? 그러고 보니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비가 오긴 했었다. 바다가 우리를 미워해서 마지막 남은 대피처마저 없애버리려는 건가? 아닌데. 걔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울고 싶어지는 이유가 친구라 믿었던 존재를 향한 배신감 때문인지 아니면 잠자리가 포근해서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가장 높은 지대에, 가장 깊숙한 지하에 위치한 방공호는 비가 오는지 오지 않는지 흔적조차 들리지 않았다. 사콘은 기어이 몸을 일으켰다. 조심스레 가벽 역할을 하던 천을 걷고 나간다. 경계를 서던 사람들은 누적된 피로에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까치발을 딛고 계단을 한 층 한 층 올라간다. 지상으로 가까워질수록 빗소리가 쏟아진다. 사콘은 심장께에 손을 얹어보았다. 터질 듯이 쿵쿵댄다. 숨에 습기가 차고 시야가 어두컴컴하다. 문을 열어본다. 세상은 밤이었다. 폭우가 퍼붓는 밤.

 

지대가 워낙 높았고, 배수도 철저하게 설계되어 있었기에 거주 구역은 침수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건물 밖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사콘은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꼭 그날 같았다. 그 종말의 날. 세찬 빗줄기에 방향감각을 상실할 것 같던 날. 드넓은 세상에 홀로 나약하게 던져지던 날. 그러나 사콘은 물어야만 했다. 확신을 얻어야만 했다. 정말 세상을 망하게 하려고 나를 찾아온 건지. 정체가 뭔지. 내가 너에게 정을 붙여도 되는 거였는지. 제대로 뜨기도 힘든 눈으로 꾸역꾸역 바다를 응시한다. 멀리서 새파란 빛무리가 보인다.

 

달린다. 넘어지고, 무릎이 까지고, 흙탕물로 옷이 더러워져도 개의치 않았다. 사콘은 얼굴로 끊임없이 흐르는 물을 팔로 문질러 닦아내며 해안으로 향했다. 푸른 존재는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 있었다. 상대가 반갑게 손을 흔든다. 마주 웃어줄 여유는 없었다. 울어도 티가 나지 않을 날씨라 다행이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화가 나고, 투정을 부리기에는 철이 일찍 들어서 그것도 억울하고, 겨우 친구가 생겼나 했는데 생각해보니 상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이상한 말을 들었는데 잠은 오지 않아서. 모든 게 짜증이 나 죽겠어서. 다짜고짜 소리를 친다.

 

"야, 너!"

 

목소리는 비에 파묻혀 잘 나아가지 않았다. 목에서 피 맛이 나도록 숨을 들이킨다. 세상이 터져라 고함을 지른다.

 

"진짜 네가 비를 내리는 거야?"

 

여기가 물에 다 잠길 때까지? 그래서 세상이 아예 망해버릴 때까지? 우리가 고향을 잃을 때까지? 고래고래 화풀이를 하는 사콘에게 사부로지는 의아한 표정만 보였다. 제대로 들리지 않는 건지, 아니면 들어도 이해가 안 되는 건지, 이유야 어찌됐든 들켰다는 태도는 아니어서 사콘은 내심 안심했다. 시야가 뿌예질수록 의식은 멀어져가고 빗소리는 익숙하게 아득한데, 유일하게 알아볼 수 있었던 건 당황한 듯 연신 뒤를 돌아보는 사부로지와 저만치서부터 달려드는 거대한 파도였다.

 

고꾸라지고, 휩쓸리고, 상대가 제게 손을 뻗는데, 몸은 가라앉고. 정신을 잃기 직전, 사콘은 태어나 처음으로 바닷속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순환을 멈춘 해류 한가운데서 비린 숨을 내쉬며 한때 찬란했을 세상과 스스로를 동정한다. 수면을 찌를 듯 높게 솟은 건물과 부유하는 문명의 잔해, 색을 잃은 산호초와 검푸르게 흐르는 물살. 생명이 지속되지 못하는 행성에는 원망할 대상조차 없었다. 불확실만 가득한 해면 아래서 사콘은 다만 한 가지 이유를 짐작했다.

 

너는 그저 바다를 사랑했구나.

세상엔 아무런 의도도 없었구나.

 

스스로 납득할 겨를도 없이 졸음이 쏟아진다. 사콘은 눈을 감았다.

 

 

 

그 이후의 기억은 선명하지 않다. 도시가 잠길 듯 폭풍우가 치다가 찰나 기적처럼 하늘이 갰고, 사콘은 해안가 어딘가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채로 발견됐다고 한다. 몇 년을 기다린 구조선이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가까스로 도착했으며 반나절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탑승은 빠르게 진행됐다. 사콘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지구의 중력 궤도를 벗어난 후였다. 축축 처지는 몸으로 창문에 붙어 마지막으로 바라본 지구가 온통 푸른색이었다는 것 외에, 그 날이 실재했었음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따로 없었다.

 

새로 보금자리가 된 행성은 적당히 아름다웠다. 최대한 과거 지구와 비슷하게 가꾸어 놓아 많은 이들의 향수를 충족시켰으며, 이미 어느 정도 터가 잡힌 후라 생기가 넘쳤다. 사콘은 그곳에서 학교에 다녔고, 친구를 사귀었고, 삶을 만들어나갔다. 적응은 특별히 어렵지 않았지만 딱 하나 해소되지 않는 그리움이 있었다. 새로운 행성에는 바다가 없다는 거다.

 

아직까지도 비가 내릴 때면 사콘은 열한 살로 돌아갔다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작별 인사치고는 난폭한 해일이었지만 기억을 거슬러도 두렵지는 않았다. 지금도 그 별에는 그 애가 살겠지. 바다는 언제나처럼 어두우면서도 푸르겠지. 부채감도, 책임감도, 죄책감도 굳이 내 몫으로 두어야 하는 감정은 아니겠지. 어쩌면 반쯤은 덮어씌운 상상이나 왜곡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정말 현실이었는지 끝없이 의심해야 하면서도 결코 포기할 수는 없는 기억들이 있는 거다. 사콘에게는 그 푸른 빛이 그랬다.

 

 

 

 

 

티없이 맑을 하루에 내게로 와

바람보다 시원한 파도를 띄워줄게

끊이지 않는 여우비에 달이 그리운 날이면

우주를 집어삼킨 짙푸름을 보여줄게

약속은 허울뿐이라 해도

막연한 신의만은 유성으로 남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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