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세상의 수신자에게
셋츠노 키리마루 & 쿠로키 쇼자에몽
해리 @haeri_nin
종말 즈음에 키리마루는 작별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키리마루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한결같았다. 차갑고 치밀하지만 단단하지 못해 애정에 패배하고 마는. 그것이 키리마루가 내린 情의 정의였고 그 애의 사랑은 종류를 막론하고 그러했을 것이라 감히 자신할 수 있었다. 내 생각에 우리는 다음 생에서도 이럴 것 같아. 허구한 날 술 처먹고 연락도 없이 동창 집 찾아가서는. 20세기의 멸망 전 킨고네 집 거실에 대자로 누워 키리마루가 했던 말이었다. 그때 나는 뭐라고 했더라. 분명 전생에도 그랬을 거라며 웃었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이천 백년의 증발을 목전에 두고 텅 빈 도로 한가운데를 걸었다. 흰색 교복 셔츠는 이미 붉고 검은 것들로 빼곡히 물든 지 오래였다. 자수로 새겨진 학교 로고가 없었다면 교복임을 알아보기 힘든 수준이었다. 우리는 반나절 넘게 말없이 걸을 때도 있었고 현실도피를 목적으로 쓸데없는 잡담을 할 때도 있었지만 결코 필요 이상의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키리마루는 말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고 나는 듣는 게 익숙했으니까. 우리가 무너진 학교를 막 떠났을 때 그 애는 무려 삼일 동안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학교가 폭삭 주저앉았을 때 키리마루는 그곳에 없었다. 그게 그렇게 그 애의 숨통을 옭아맸다. 수업은 끝났지만 곧 있을 시험을 대비해 대부분의 학생들이 학교에 남아있었고, 정규 수업도 곧잘 빼먹던 키리마루는 그날도 점심시간 이후 소리 없이 사라졌다. 나는 반장의 의무로 그 애의 집에 각종 유인물을 전달하러 가는 길이었다. 파일을 이메일로 보내거나 뭣하면 사진 찍어 메신저로 전송하는 손쉬운 방법이 있었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그 애의 안부를 확인하라는 선생님의 속뜻이 나는 오히려 달가웠다. 한두 번 오간 후에는 가파른 언덕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그날 대기는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게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뜨거웠는데, 빨리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걸어온 길을 뒤로하고 아득한 폭발음이 들렸다. 키리마루의 집에 거의 다 도착했을 즈음이었다. 더위라도 먹었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자 언덕 하나 건너 연기가 자욱하게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봉투를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벌써? 예상치 못한 변이에 혼란스러웠지만 계속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된 이상 한시라도 빨리 키리마루를 만나야 했다.
종잇장처럼 얇은 모니터를 접어 다니는 시대에 키리마루의 집에는 그 흔한 텔레비전조차 없었다. 그 대신 겨우 돌아가는, 낡아빠진 라디오가 하나 있었다. 요즘은 아무도 라디오를 듣지 않았다. 그게 뭔지조차 모르는 애들도 많았다. 사람들은 점차 감각의 영역을 넓혀갔고 청각 하나에 의존해야 하는 라디오는 이제 고물상에서도 받지 않았다. 전파를 발신하는 방송국도 나라에 딱 하나뿐이었는데 키리마루의 단칸방에서는 늘 그곳의 목소리가 지직거리며 흘러나왔다. 라디오네, 언젠가 가벼이 던진 말에 그 애는 옆집 할머니가 주셨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 할머니를 알았다. 할머니는 어느 삶을 살아도 평생 무엇도 베풀지 않겠다 다짐했으나 마지막에는 항상 뭘 하나씩 남겨 두고 가셨다. 그리고 키리마루는 어느 삶에서든 그 자기중심적인 다짐을 계승할 기세로 동경했다. 마치 자신은 그리될 수 없다고 되뇌듯이.
건네주는 유인물 봉투 모서리가 조금 구겨져 있었다. 키리마루는 접힌 자국을 물끄러미 보았다.
- 별일 없어?
별일?
- 응, 학교. 애들. 난 못 본 지 꽤 됐으니까.
그냥 똑같지 뭐. 대답하려는 순간 라디오에서 긴급 속보를 내보냈다. 백색소음 같았던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정적을 비집고 또렷해졌다. ○○고등학교에서 폭발 사고가… 경찰은 앞서 발생한… 연관이 있는지……. 전파가 불안정해졌는지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이윽고 완전한 잡음이 되었다. 키리마루는 아무 말 없이 봉투 구석의 접힌 자국을 보았다. 할 말을 고른다기보다는 어떠한 말도 잃어버린 얼굴이었다. 그런 키리마루를 앞에 두고 나 역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 둘 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 것에는 익숙했으나 나는 절망이든 희망이든 다음이 올 것을 알았고 그 애에게는 늘 마지막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지긋지긋한 레퍼토리였다. 처음에는 부모님, 그다음에는 할머니, 그다음에는 친구들. 그 전후쯤 선생님. 그러나 이십 세기 이후의 종말은 수백 년 전 매일같이 사람들이 죽어나던 때와 많이 달랐다. 그때에는 종말이 차라리 구원처럼 느껴지지 않았던가. 저번 생에서는 사람들의 마지막을 지켜보다 기어코 마지막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그 애를 기억한다. 다른 아이들을 따라가느라 내가 지켜볼 수 없었던 것을.
가야겠어. 키리마루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지나치는 걸음이 조금 위태로웠고. 나는 그 애를 따라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언제나 갑작스레 혼자가 된 키리마루가 무슨 생각을 할지 나는 단 한 번도 알 수 없었다. 그 애를 두고 먼저 떠나버린 적도 많았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이 되어 말없이 무너지는 그 애를 받아내기에 너무 늦어버린 삶들도 있었다. 전자의 죽음에서는 왜 모두가 너만을 남겨두고 가야 하는지, 후자의 찰나에서는 왜 무너지는 너를 보는 것이 늘 나인지 죽어가며 생각했다. 기억의 문제라면 나 말고도 산지로나 키산타가 몇 개의 삶을 기억했다. 헤이다유는 단편적인 장면이나마 쥐고 있었고, 란타로와 단조에게는 이따금씩 데자뷔가 일었다. 우리는 모든 삶에서 열한 명이었고 그 애는 늘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가장 큰 희생자가 되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럴 수도 있지. 나와 다른 아이들과 선생님과 할머니와 아무런 연고가 없던 스물다섯 번째 셋츠노 키리마루도 그전과 전 전의 키리마루처럼 애정에 패배했는지도 모르지. 그러면 나는 애정을 두고 갈 수 없는 키리마루를 두고 갈 수 없어 너무 늦어버릴 때까지 같이 숨을 참는지도 모르지. 어쩌면 우리는 가장 치열하게 마지막을 갈구하는지도 모르지. 그래서 나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삶에서, 그 아이들의 마지막을 배웅하겠다 기어코 선언했는지도 모르지.
새벽에는 눅눅한 냄새가 났다. 우리는 낡은 컨테이너 박스에서 쪽잠을 자고 난장판이 된 구멍가게를 털어 식량을 보충했다. 키리마루는 이따금씩 초콜릿을 까먹다 그만 두자는 말을 했다. 더 이상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어, 이 모든 게. 그러면 나는 이제 곧 선착장에 도착한다고 대답했다. 그 애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주 잠시 동안의 체념이었다. 우리는 나란히 누워 서로가 자는 척하는 것을 들었다. 어떤 밤에 키리마루는 간헐적으로 숨을 헐떡였고 나는 존재를 알리기 위해 부러 뒤척이거나 기침을 했다. 나는 하루에 열댓 번 고민하다가도 그 애가 헐떡이다 멎어버릴 것을 생각하면 발끝부터 두려워졌다. 지평선 위에서 줄타기를 하는 그 애 밑에서 자꾸만 손을 내미는 것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죄책감. 무력감과 공허함. 지키겠다 다짐해놓고 일말의 저항조차 없이 보내버렸다는 자기혐오. 아지랑이 피어오르던 갓길을 기억한다. 네가 나를 살렸으니 숨 좀 트라는 말이 혀끝에서 산지사방 흩어졌다. 생사가 뒤바뀐 시점에서는 힘없는 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열한 명이 모두 공범이었다.
거의 다 왔다는 말을 몇 밤째 되풀이하다 보니 정말로 선착장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즈음 키리마루는 배에 자리가 없으면 어떡하지, 그전에 식량이 떨어지면, 같은 소리를 늘어놓았고 나는 그때마다 나 버리지 말라고 했다. 바다처럼 불어난 그 애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애는 이미 떠나보낸 애정들과 가끔 집에 찾아와 안부를 묻는, 자신과 함께 살아있는 나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했다. 전파가 끊겨 완전히 고물이 된 라디오를 거울 보듯 쳐다보았다. 우리는 지금 죽어도 분명 다음 생에서 재회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 생에서도 마지막 두 사람이 되어 뻔한 결말을 맞겠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번 생의 키리마루를 바닷속에 처박을 수는 없었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그 애를 제치고 내가 가장 마지막까지 남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인파에 밀려 구조선의 가장 구석에 몸을 처박았다. 덥고 습했지만 쌓아올린 승객들을 보면 침몰하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이다 싶었다. 어수선하고 침울한 소음 사이로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키리마루는 구조선 밖으로 상체를 숙여 바다의 표면을 훑고 있었다.
- 있잖아.
응?
- 어른이 되면, 세상의 모든 라디오를 사들이고 싶었어.
…….
- 요즘은 아무도 안 듣잖아. 그러니까 온갖 고물상을 다 뒤져서, 내가 그 라디오들의 주인이 되고 싶었어.
왜?
그 애는 전파가 끊긴 라디오처럼 입을 다문다. 사람들의 소음이 노이즈처럼 지직댔다. 수신자 없이 떠도는 수많은 라디오를 생각한다. 수많은 수신자들을 떠나보낸 단 하나의 라디오를 생각한다. 속이 울렁거렸다.
다음 생에는 말야.
- …….
티비나 휴대폰 대신 라디오를 듣는 세상에 태어나자.
- 그게 말이 되냐.
안 될 건 또 뭐야. 유행은 돌고 돈다잖아.
키리마루는 여전히 바다를 보며 마르게 웃는다. 그 애는 여전히 바다를 보았고 우리는 여전히 종말을 향해 달려간다. 기적 하나 없이 작별에 익숙해지는 나날이다. 그러나 그 애는 더 이상 죄책감에 익사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날 학교에 두고 온 아홉 명과 경애하는 두 선생을 떠올렸다. 우리는 영원히 패배하며 상실을 부유할 테지만 그것이 사랑임을 안다. 또한 그들의 사랑은 우리가 도착할 내세에 가장 먼저 다다르는 것. 그러니 우리는 이제 괜찮다. 우리 세상의 모든 수신자에게. 다시 전파가 닿는 그날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