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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행성 위 신발 두 켤레

도이 한스케 & 셋츠노 키리마루

베리 @nintama_be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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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8일 월요일  여전히 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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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주한 발들이 땅을 짚고 다시 박차면 모래가 흩날려요. 마을을 모두 메우는 건 단단한 옷을 둘러맨 채 창을 쥔 이들이 목이 쉬도록 지르는 소리이고요. 그 후엔 매캐한 먼지들은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또 우리에게 찾아오죠. 숨이 막혀오는 건 익숙한 일이니 괜찮아요. 이제 신경 쓰지 않기로 했거든요.

 지금 그 순간이 그리워지냐 묻는다면 단연코 아닙니다. 그건 제 삶의 첫 사고였으니까요. 당시 홀로 설 준비는 커녕 그 필요도 모르던, 어렸을 뿐인 나에게서 모든 걸 앗아간.. 그런거죠. 지울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평생 안고 가야만 할 짐 덩이 같은 거. 다만 제가 지금 이런 표정을 짓고 있는 이유는요. 이리 무력하게 서서 무력한 표정을 하고 무력히도 주저 앉아있는 건, …그래, 깨끗하고 투명한 강에는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는 법칙이죠. 정확히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거. 그 말을 오래도록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젠 알겠어요. 저도 여기서 살아남지 못할 것 같거든요. 끝 모를 정적을 버티는 법을 몰라서요. 선생님, 도이 선생님은 아시나요? 비워진 시간을 채우는 법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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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 날이 모든 일의 원흉이었다. 아닌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었으니 이유가 되진 못하려나. 어찌됐든 그 날, 무언가가 잘못되어 있었고, 그날부터 모든 게 ‘끝났다’는 것만은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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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1일 월요일 맑음. 평소와 다름 없이 찌뿌둥한 몸으로 좀 더 자고 싶다고 생각하며 눈을 떴다. 종종 지나치게 개운한 몸과 따스로이 들어오는 햇살, 지저귀는 새소리, 그러니까- 란타로와 신베가 나를 깨우는 것을 실패하고 간 날. 눈을 떴는데 둘의 이불을 가지런히 정리되어 장 속으로 들어가있고, 밖에선 실기 수업을 하고 있는 상급생 선배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때. 답지않게 늦잠을 자버리는 그런 날이 간혹 분명 있긴 했으나 그게 오늘은 아니었을 거란 이야기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나는 분명 평소와 다름없이-재차 말하지만 가끔의 늦잠을 제외하고- 일어났을 터인데, 이상하게도 방이 고요하다. 인기척 하나 없는 듯한 느낌에 오른 손으로 눈을 벅벅 비비며 윗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가 오른쪽으로. 그러고 다시 왼쪽으로. 또 다시 오른쪽. 그리 세 번을 두리번거리고 소리를 지른다. 지각이다! 큰일이네, 서둘러 따스한 이불을 재껴두곤 흰 잠옷을 푸르고 두건을 찾았지. 옷을 입으면서도 홀로 중얼중얼 투정을 부리는 것도 잊지 않고. "이상하다. 딱히 오래 잔 것 같지도 않은데!" 잔뜩 억울한 목소리로. 물론 이상한 점은 그것만이 아니긴 했다. 단지 번거롭게 신경쓰지 않았을 뿐이었지.

 문을 열지 말 걸 그랬나. 서둘러 나가지 말 걸 그랬나. 차라리 어제 잠들지 말 걸 그랬나. 어디부터 문제였을까. 왜 잘못 됐을까. 알 턱이 없었다. 문을 연 순간부터 마주한 건 상식으론 도저히 설명할 것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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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32일 화요일 흐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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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이 사라진지 벌써 하루가 지났어요. 아이들이 자취를 감춘지 벌써 하루가 넘었다고요. 어제 하루를 정리하자면, 학원을 온종일 뛰어다니다가 지쳐 주저앉아 울었고, 내 울음소리에 달려온- 남아있던 단 한 명의 사람을 만났어요. 도이 선생님이었습니다. 선생님께 안겨 울다가, 이것저것 묻다가, 알 수 없다는 답변에 무력히 다시 눈물만 쥐어짰지요. 선생님은 날 가만히 다독여주다 노을도 저 땅 아래로 묻혀 사라질 때 즈음 내 손을 잡고 일어나 방으로 돌아왔어요. 도이 선생님과 기숙사에서 함께 자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대로 지쳐 잠이 들었지요. 지금도 저녁이에요. 하루 종일 인술 학원을 살펴 보았거든요. 발자국은 없는지, 무언가 다툼의 흔적이 남진 않았는지.. 그런 것들이요. 결과는.. 짜증나니까 안 쓸래요. 내일은 마을에 돌아가보기로 했고, 지금 도이 선생님은 목욕탕 불을 때러 가셨어요. 전 틈새를 타 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원채 귀찮고 돈도 되지 않다 보니 이런 거, 원랜 쓰지 않았지만요. 이젠 그래야만 해야 할 것 같았어요. 언젠간 오늘도 잊어버릴 것 같아서요. 도이선생님껜 말하지 않았어요. 도이 선생님은 티를 내지 않는다고 하지만 어제부터 눈가가 붉어져서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표정을 하고 계신 걸요. ...발자국소리다. 그만 적어야겠어요. 첫 일기는 이걸로 끝입니다. 달이 반 즈음 차있고, 지금 자러 갈 거예요. ... 자고 일어났는데 도이 선생님도 사라져 있으면 어떡하죠?


 

[ 12월 34일 목요일 흐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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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없습니다. 진짜 미치도록 조용해요. 젠장. 옆집 아주머니도, 집주인 아저씨도, 언젠가 아르바이트를 갔던 옆옆집, 그 윗집, 그리고 두 집 너머 곳, 또.. 어쨌든요. 아무도 없어요.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항상 이상한 추측들을 하며 말을 걸어오는 건 살짝 싫증이 났지만 사라져버렸으면 했던 건 아닌데 말이에요. 아주머니네엔 식어버린 밥이 남아있는 밥솥이 있었고, 또 거리엔 냄새 나는 생선이 즐비하게 놓여있습니다. 며칠은 방치된 것 같아요. 뚜껑을 덮어주고 왔습니다. 옆 집 채소가게에서 먹을 것도 챙겨왔고요. 예전엔 이런 상상을 꽤나 했었는데.. 세상 사람들이 사라져서 먹고 싶은 음식도 마음껏 꺼내 먹고, 길바닥 중앙에 누워 따스한 햇살 아래서 낮잠도 자보고, 으리으리한 마을 부자집의 두껍고 폭신한 이불 위에 뛰어들어 잔뜩 뒹구는 거죠. 꿈만 같은 상상이었는데, 차라리 그대로 꿈으로 남아있었으면 좋았을 걸. 상상과 현실은 역시 다른가 봐요. 슬프니 일기는 여기까지 쓸래요. 지금 도이 선생님이 저녁을 먹으라며 부르고 있거든요.

 

[ 12월 36일 토요일 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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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라우라우라산 저 너머 마을까지 돌아봤어요. 이변은 역시나 없었고요. 지쳐 벽에 기대어 있다가 한 가지 가정을 해봤습니다. 이 모든 게 아주 긴 악몽이라는 거죠. 꿈은 현실과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잖아요. 주먹밥 하나를 채 먹지 못하고 깨기도 하고, 지구 한 바퀴를 도는 여행을 하고 깨어나기도 하죠. 일종의 착각 중인 거예요. 사실은 내가 지금 아주 깊은 꿈을 꾸고 있는데, 현실인 줄 알고 있는. 그런 거. 왜, 꿈을 꿀 때는 그게 꿈인 줄 모르잖아요. 내가 하늘을 자유로이 날고 번개를 쏴대도, 아주 큰 괴물이 나와도, 갑자기 행성이 날아와도. 그저 그게 그 순간의 현실인 거죠. 내가 생각하고도 웃기면서 어이가 없어서 장난스레 도이 선생님께 말했더니 저를 아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봤어요. 그 다음엔 어깨가 터지도록 안아 주셨고요. 멍청한 내가 불쌍해서 그러신 걸까요. 잘 모르겠어요. 그냥 선생님은 답을 알고 있을까 묻고플 뿐인걸요.

 

[ 12월 38일 월요일 여전히 흐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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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주한 발들이 땅을 짚고 다시 박차면 모래가 흩날려요. 마을을 모두 메우는 건 단단한 옷을 둘러맨 채 창을 쥔 이들이 목이 쉬도록 지르는 소리이고요. 그 후엔 매캐한 먼지들은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또 우리에게 찾아오죠. 숨이 막혀오는 건 익숙한 일이니 괜찮아요. 이제 신경 쓰지 않기로 했거든요.

 지금 그 순간이 그리워지냐 묻는다면 단연코 아닙니다. 오히려 끔찍한 걸요. 그건 제 삶의 첫 사고였으니까요. 당시 홀로 설 준비는 커녕 그 필요도 모르던, 어렸을 뿐인 나에게서 모든 걸 앗아간.. 그런 거죠. 지울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평생 안고 가야만 할 짐 덩이 같은 거. 다만 제가 지금 이런 표정을 짓고 있는 이유는요. 이리 무력하게 서서 무력한 표정을 하고 무력히도 주저 앉아있는 건, 너무 조용해서예요. 너무 조용해서…그래, 깨끗하고 투명한 강에는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는 법칙이죠. 정확히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거. 그 말을 오래도록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젠 알겠어요. 저도 여기서 살아남지 못할 것 같거든요. 끝 모를 정적을 버티는 법을 몰라서요. 선생님, 도이 선생님은 알까요? 비워진 시간을 채우는 법을 아실까요.

 


 

[ 12월 39일 화요일 흐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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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가 미치도록 그리워지는 날엔 어떡해요? 따스한 곱슬머리에 안경을 쓰고 다니던, 또 항상 배고프다며 입가심 거리를 찾아다니던. 울퉁불퉁한 글씨를 보여주며 멋쩍게 웃던. 소매를 걷은 채 빗자루를 꽉 쥐곤 먼지 한 톨 용서 않던. 민달팽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한시도 떨어질 줄을 모르던. 일류 검호가 되고 싶다며 검을 쥐어 들던. 화승총만 쥐면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 진지해지던. 그리고 기계장치에 관해선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던 둘과 이리 장난스럽고 엉뚱한 우리들을 항상 힘차게 이끌어주던 그 애까지.

 그 애들이 미치도록 그리워지는 날에는 어떻게 해요? 어찌 잊어야 해요. 잊어야 하는 건가요. 나의 삶을 도려내야만 슬퍼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선생님. 저는 모르겠어요.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왜 하필 남겨진 사람이 저인지, 그때도 지금도. 몇 날 며칠이고 매일을 거듭하며 하루를 온통 생각에 잠겨 보내어도 알 수가 없어요. 이 세상 모든 불운이 나에게 달려들고 있는 건 아닐까요. 요새는 매일 그런 터무니없는 착각을 하고 살아요. 살고 있어요. 기어코 죽지도 못하고 있다고요. 숨을 들이쉬면 아픈 공기가 목을 할퀴어 오고 숨을 내쉬면 내려지는 어깨가 모든 걸 잃은 기분이라- 제 숨 하나조차 모두 빼앗긴 채로 말이에요. 그래요. 산다고 할 수 없는 거죠.

 불행을 바란 적 같은 거 없어요. 행복같은 사치를 부리고 싶어했던 적은 분명 있지만 벌써 고이 접어 침대 아래 숨겨두었다고요. 그저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기만 바랐다고요. 욕심내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된 걸까요.

 비워진 시간을 채우는 법을 아시나요. 도려내진 심장을 다시 만드는 법은 뭔가요. 사라진 삶을 기어코 붙잡아 찾아가는 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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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9일 화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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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미안. 네가 요즘 무언갈 쓰고있고, 그걸 나에게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는 건 알고 있어. 그치만 요즘 네 표정이 많이 좋지 않아서, 혹여나 안 좋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걱정되어 네 공책을 찾게 된 무례를 용서해주길 바래.

 

 

키리마루에게.

 

 누군가가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건 우리의 탓이 아니야. 그저 사람이 감정에 충실한 동물일 뿐이라는 거지. 아마 우리는 살아도 죽어서도 기쁨에 벅차 오르다 사무치는 슬픔에 주저앉고 또 희망에 가슴이 뛰다가 좌절하는 걸 멈출 수 없을 거야. 우리의 운명이 감정을 잃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키리마루. 셋츠노 키리마루.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이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이건 우리가 어쩔 수 있었던 게 아닌 거야. 홀로 남는 경험을 거듭하게 되는 것도, ... 우리의 탓이 아니야.

 나도 종종 그리워져. 사실 종종이라는 말을 덧붙일 수 없을지도 몰라. 공백인 세상은 자꾸만 생각을 거듭하게 만들고 나는 결국 울며 돌아가고 싶다고 하루가 멀다 하고 외쳐 댈 뿐이니까. 돌아가서 그리웠던 사람들을 팔이 으스러지도록 끌어안고 하고 싶었던 말들을 모두 해주고 싶어. 항상 어묵 반찬에 투정을 부려 죄송했다고, 당신의 반 아이들 자랑이 지겨웠지만 믿음과 사랑이 묻어나서 싫어하진 않았다고, 너희의 이런 점이 기특했다고, 그때 구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했다고. 갈 곳 없던 저에게 집을 만들어주셔서 주저앉지 않았다고. 너희의 순수함과 강인한 다정함이 참 자랑스웠다고. 선생님이라고 불러주던 너희의 말들이 나를 선생으로 만들었다고. 모두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나를 살게 했던 이유가 지금 내 눈 앞 살아 숨쉬는 너희였다는 말들을 했어야 했는데. 매일 그렇게 평생 전할 수 없을지도 모를 말들을 고르고 있어. 무슨 말이 더 진심을 전할 수 있을까, 와닿을까, 혹 부담스럽진 않을까. 그런 사소하면서도 이젠 너무 큰 걱정들을 하면서 살아.

 그래도 언젠가 이 걱정이 의미를 가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키리마루? ...하하, 넌 분명 턱없는 희망이라며 눈썹을 찡그리고 투덜대겠지. 네 목소리가 벌써 들려오는 것 같아. 뭐, 괜찮잖아. 멋대로 하늘을 날고 싶다는 꿈을 꾸어도 누구도 우릴 나무라지 못해. 원래 제멋대로인 일방통행을 희망이라 부르는 거야. 희망은 원래 그런 거란다. 걱정하지마. 세상은 우리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테니 우리도 세상의 심리를 거슬러도 괜찮겠지. 이열치열... 6월에 수업해줬던 건데. 무슨 뜻인지 기억하니? 못하면 보충수업이니까. 각오해! 알겠지? 으,••• 그치만 진짜 모른다면 조금 배가 아파올지도 모르겠다. 내가 누누이 말했지, 모르는 건 필기하기! 잊지마.

 ...하하! 무슨 엉뚱한 소리냐니. 왜. 매번 하던 말이잖아? 세상이 달라졌다고 해서 우리도 갑자기 변해야만 하는 건 아니야. 방금 네가 그 날 후로 처음 웃은 건 아니. 10살짜리 아이야, 어린 아이야. 어른스러운 아이야. 너는 강인하지 않아도 돼. 너무 많은 걸 이해하려 들지 마. 세상은 이해 범주 밖 것들 투성이니까. 눈물이 나온다면 멎을 때까지 마음껏 쏟아내고 슬픔이 덮쳐오면 그저 눈을 감고 행복한 상상을 하자. 악몽을 이겨내는 방법은 꿈에서 깨어나는 것뿐만이 아니니까. 우린 악몽을 피해 도망다닐 수도 있는 거야. 괴물이 나오면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버리고, 운석이 다가오면 새로운 행성을 찾아 떠나는 거지. 즐겁지 않겠어? 너를 괴롭게 하는 것들을 마주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이 따스하게 채워질 때까지, 남은 게 이세상 끝 뿐이라도 도망쳐보는 거야. 그때와 같지 않아. 너와 내가 걸어온 그 길로 되돌아온 게 아니야. 우린 혼자가 아니야. 홀로 서있던 기억은 여전히 지긋지긋하게도 뚜렷하잖아, 그치. 그때보단 행복할 수 있지 않겠어? 세상에 우리 둘만 남은 게 불행이라 말하지 말기로 해. 나도 그럴게. 함께 살아가는 거야. ...나는 네가... 마음껏 울어낸 후엔 그저 행복해지기 바빴으면 좋겠어, 키리마루.

 

 p.s. 평생토록 네 안녕을 바라.

도이 한스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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