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실 안의 생존자
6학년
이청연 @Iridescent_nin
• 따옴표를 사용하지 않은 관계로 글이 난잡할 수 있습니다.
• 인물과 인물의 시점이 여러 번 전환됩니다.
• 전염병의 원인이나 근원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 전염병의 증상은 간접적으로만 등장합니다.
이사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귀가 먹먹하게 울린 탓에 꽤나 답답했다. 몇 시간이고 귀에 이어폰을 꽂아두고 있을 때 느끼는- 마치, 귓속이 끈적한 액체로 가득 찬 것 같은 느낌. 이러면서도 발음은 뭉개지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왜 그래, 센조? 별 일은 아니야. 잘 되어 가고 있어? 음, 아쉽게도 아직 진전이 없네. 조급할 필요 없어. 눈동자를 응시한다고 해서 생각을 꿰뚫을 수는 없었으나, 표정만으로도 대강 유추할 수는 있었다. 센조가 아무래도 불안해하는 것 같은데, 쉽사리 확신할 수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뒤이어 떠오르는 왜 불안해하는 거지, 라는 질문엔 답하려 하지 않았다. 평소에 비해 약간 누그러진 말투가 특이했는데 눈치를 살피는 건가 싶어 센조는 가만히 있다가 잠은 꼬박꼬박 자고 있냐, 힘들거나 불편한 건 없냐, 등등의 자질구레하고 형식적인 질문들을 내뱉었다. 정해져 있는 대답을, 고개를 살래살래 저어 표현했다.
드르륵, 덜컹. 결코 깔끔한 소리라곤 빈말로도 못하겠는걸. 바닥의 정체 모를 센조의 뒷모습을 볼 수는 없었으나, 깔끔히 높게 묶어올린 자주색의 머리카락은 선연했다. 어떻게 그리 깔끔하게 유지할 수 있는 걸까. 빗은커녕 생필품 하나도 찾기 어려워서 다들 머리카락이 부스스해진 반면 첫만남과 다름없이 센조의 머리카락은 비단 같았다. 어쩌면 원래 그런 체질을 가진 걸지도.
이사쿠의 방을 들렀다 간 센조가 곧장 케마한테 왔다. 뭐야, 무슨 일인데. 센조는 잠시 아무 말 않고 가만히 내 얼굴을 응시하기만 했다. 괜스레 더 불안해져 성질이라도 내야 하나 싶었는데 센조가 입을 열었다.
이사쿠가 좀 힘든 것 같으니까, 네가 가서 위로 좀 해주면 어때. 네 말은 잘 들어주잖아.
타치바나 센조. 케마는 머릿속으로 나열된 정보들을 훑었다. 어디에서 왔댔나. 모르겠어. 몬지로와는 많이 이야기하고 많이 싸우기도 했으니 알 건 다 알지만, 센조는 왠지 분위기가 고고해서 말 걸기가 어려운 걸.
이 전염병의 골치 아픈 점은, 첫 증상으로는 알기가 힘들다는 거야. 게다가 남한테 옮기면 낫는다는 헛소문까지 돌아서 여러모로 위험해. 오감을 차례차례 마비시키는 거라 치명적이고, 나을 방법도 없어.
슬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주억이는 그는 갓 스물 된 성인이라기엔 앳된 얼굴을 갖고 있었다. 약간 낮게 묶은 곱슬거리는 연갈색 머리카락이 고개를 따라 흔들렸다. 옆에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의 이름은 케마 토메사부로, 흑발이었으며 이사쿠에 비해 머리카락이 짧았다. 머리끈을 풀면 둘의 머리카락 길이는 상당히 차이가 났는데, 이사쿠는 머리카락이 등까지 왔고 토메사부로는 단발 정도였다. 토메사부로의 머리카락은 위로 묶으면 작은 짚단같은 모양새가 되는데, 그래도 목에 머리카락이 닿아서 따끔거리는 건 싫다며 꿋꿋하게 묶고 다녔다. 전염병 때문에 살고 있던 집조차도 위험해질 지경이 되자, 둘은 수 일 동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녔고, 일찌감치 정부의 명령으로 닫혔던 학교가 바로 새로운 본거지가 된 것이다. 식당, 보건실, 과학실 등 필요한 것들은 거의 다 구비되어 있었고, 넓은 공터에다 담벼락까지 있었으니 충분했다. 바깥에서 식자재를 찾아오는 것만 해결한다면 수 년은 족히 문제 없이 생활할 수 있을 터였다. 어딘가를 다치더라도 서로의 전공이 도움이 될 터였다. (이사쿠는 의대생이었고, 케마는 건축학과였으니 말이다.)
최근 이사쿠는 새로운 가설이 생각났다나, 부쩍 과학실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무언가 진전이 있는 건지 그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그저 나날이 갈수록 피곤해져 보이는 안색에 걱정할 뿐이었다. 워낙 이사쿠가 허약한 체질이기도 하고. 어릴 때에도 잔병치레가 잦았던 그였다. 이러다 진짜 쓰러지는 거 아닌가 몰라. 케마는 불안한 생각을 떨치러 겉옷을 주워입었다.
이사쿠, 순찰 돌아보고 올게.
과학실 문을 열고 빼꼼 들여다본 후, 시선이 마주치기 전 얼른 고개를 떼며 소리쳤다. 괜히 집중하는 데 방해하는 것도 그렇고. 그나저나, 오늘은 뭐라도 수확이 있었으면 좋겠다.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꼬리를 물고 늘어지던 생각들이 조금 스러진 듯했다.
길을 따라 걸으면, 전혀 관리되지 않은 잡초와 덤불이 무성하게 자란 게 보인다. 강의 옆에 있는 긴 산책로인데, 관광 명소로도 유명했으나 이제 오지가 될 예정인 곳이다. 과거에는 도로변의 나무가 죄다 벚나무라서 벚나무길이라고 불렸었다. 그때는 도로에 차가 빽빽했으며 사람들은 창을 열어 팔을 휘적이곤 했고, 운 좋게 예쁜 꽃봉오리가 손에 들어오는 사람도 간간이 보였더랬다. 지금은, 꽃도 다 지고 낙엽도 전혀 관리되지 않아 분위기가 흉흉할 뿐이었다. 보도블럭이 낡은 티를 내는지 틈이 벌어져 있었다.
이 모습을 보고 누가 이곳이 벚나무길이었음을 알아볼까. 곧 겨울이 다가올 테지만 아직 날씨는 선선한 정도였다. 바람에 냉기가 스민 것은 무시할 수 없었지만 버려진 옷가게는 수두룩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전염병 전의 도시의 모습과 달라진 건 길바닥의 풀, 시야를 괴롭히는 시체더미, 부서지고 깨진 유리창 정도였다. 그러니까,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바뀌었다는 말이다ㅡ 발바닥에 유리 파편이 자그락거리며 밟혔다. 공원의 작은 편의점이 털린 흔적이다. 어느새 벚나무길 옆의 건물까지 다다른 그가 발바닥이 뚫리지 않게 조심하며 주변의 유리조각들을 발로 쓸었다. 하필 날씨도 우중충한데, 1층의 편의점 로고밖에는 보이질 않았다. 위층의 간판이 죄다 흐릿해서 글씨 하나도 제대로 읽히지가 않았다. 위층에 뭐가 있든 음식이 있을 것 같진 않으니, 계단을 찾아 올라가려는시도는 깔끔하게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편의점 안은 거의 텅 비어있었다. 이 도시에서 가장 만만한 곳이 편의점과 마트니까, 옛날 옛적에 죄다 쓸어갔을 거란 예상은 했다. 포기하고 뒤돌아 가려는 그때 편의점 뒷편에서 낯선 인기척이 느껴졌다. 반응하기도 전에 그 안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뭐야, 사람이야? 감염자라면 저리 꺼져. 날 선 반응에 케마는 두 손을 들어보였다. 공격할 의사는 없다고. 감염자도 아니고. 이 마스크 안 보여? 그 말에 인상을 잔뜩 찌푸린 남자가 뒤쪽의 문을 열고 나왔다. 틈바구니로 대리석 계단이 보였다. 저 안쪽에 있었구만. 어차피 올라갈 생각은 없지만.
남자는 잠시 갈등하는 듯싶더니 주머니에서 작은 복주머니 모양의 무언가를 꺼냈다. 성인 남성의 주머니에서 나오기엔 조금 이질적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남자가 뜬금없이 그걸 마스크 앞에다 가져다 댔다. 뭐, 뭐하는 거야. 그러자 가뜩이나 찌푸려져 있던 인상이 더욱 찌푸려졌다. 향부터 맡으라는 거지, 뭐긴 뭐야. 감염자 아닌 거 맞는지 확인하는 거다. 남자의 목소리는 생각보다도 더 낮았다. 긴장한 줄 알았는데 표정 때문에 착각한 것이었다. 마스크를 아주 살짝 내리고서 향을 맡자 코끝에 라일락 향 비슷한 게 느껴졌다. 그보다, 너무 눈앞에 있어서 좀 부담스러운데. 정답을 이야기하자 남자의 인상이 조금 풀어졌다. 위층의 독서실이 본거지인 건지, 남자는 따라오라는 듯 계단으로 향했다.
그 직후 몬지로와 같이 있던 센조를 만나고, 이곳에 합류하게 되었다. 사람은 많을수록 좋다는 이사쿠의 의견이 역할이 컸는데, 넷이라는 수는 아직 터무니없이 적긴 했지만 둘보다는 컸으니 다행이었다.
…아, 맞다. 이사쿠한테 가봐야 하는데. 까먹을 뻔했네. 케마는 급히 계단을 내려가 보건실로 향했다.
이사쿠는 센조가 나가자마자 옷걸이로 팔을 뻗었다. 입은 지 오래된 겉옷이 아직 그대로 남아있었다. 머릿속을 정리할 겸 산책을 다녀오겠다는 결정이었다. 토메사부로는 뭘 하고 있을까. 이사쿠는 그가 갑작스럽게 센조와 몬지로를 데리고 왔던 몇 달 전의 일이 떠올라, 입가에 떠오르려는 웃음을 참았다. 케마는 정말이지 복을 불러오는 사람이 분명했다. 센조와 몬지로를 데려온 직후에 또 두 명을 더 데려왔으니까. 복을 불러오는 건지 사람을 불러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케마가 불러오는 사람들은 저마다 개성이 강했다. 누구나 그렇듯이.
이 사람들은 또 누구야. 곤란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은 토메사부로가 저에게 새로운 일행을 소개했다. 나도, 지금 좀 머리가 아파서, 묻지 말아줘... 평소라면 뜬금없이 왜 그러냐며 타박할 만했지만, 이사쿠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왜 머리가 아픈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토메사부로가 데려온 사람은 엄청나게- 정말 엄청나게 시끄러웠으니까 말이다.
설명하자면 긴데... 하여튼, 이 둘도 감염되지 않은 생존자는 맞아. 둘이 뭐랄까, 좀 정반대라서, 대화하는 것도 힘들었어. 이사쿠는 붉은 벽돌로 된 학교의 담벼락에 기댔다. 무슨 친화력인지 벌써 신나서 마구 소리를 질러대고 있는 사람 하나, 옆에서 모기만한 소리로 말하는 험악한 인상의 사람 하나... 무슨 행운인지 나이는 전부 비슷하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사쿠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만 같아 관자놀이를 양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얼굴에서 벗겨질 것 같은 미소를 다시 짓고서 시끄러운 일행에게 말을 걸었다. 자, 이름이 뭐라고 했어? 그 대답은 고막이 아플 정도로 컸다. 나나마츠 코헤이타다-!!! 하고 말이다. 옆에서 목소리가 작은 또다른 일행이 나카자이케 쵸지라는 이름을 중얼거렸다. 둘의 볼륨을 딱 반반씩만 섞어놓으면 될 것 같은데. 이사쿠는 이런 상황엔 활기찬 것도 나쁘지 않다며 낙천적으로 생각하려 했다. 어디서 왔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등등 알아가야 할 것이 많았다. 몇 가지 질문을 삼키고, 2층의 교실 두 개를 내주며 새로운 일행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며칠 간 지내며 알게 된 것은, 코헤이타의 머리카락은 빗질이 지지리도 안 되고 (빗는 건 포기하고 묶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의 체력은 웬만한 운동선수의 체력을 능가하며, 목소리가 엄청나게 크다는 것이었다. 코헤이타의 그 순진하면서도 열정적인 듯한 인상이 이사쿠는 퍽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작은... 그러니까, 나카자이케 쵸지는 사서였다고 한다. 책을 좋아한다고 했었나. 그게 무슨 도움이 되려나 싶었는데, 밤에 소설을 읽어주거나 기억나는 이야기를 해주는 게 습관인지, 쵸지는 저녁만 되면 일행을 전부 운동장에 불러모아서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중앙엔 램프나 모닥불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처음 몇 번은 코헤이타가 쵸지의 부탁을 받고 준비해준 것 같았다. 이 일이 일상이 된 이후로도 코헤이타가 그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사쿠는 이상하게 이 여섯 명은 마치 완전체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너무나 다르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잘 녹아드는 것 같았다. 텅 빈 학교 안에 이상한 충만감이 가득 차는 느낌. 사람의 목소리와, 형체와, 체형과, 발걸음 소리와, 그 모든 것이 조용함을 승화시키고 나서야 이사쿠는 편히 잠들 수 있었다. 그래서 좋았다.
뒤에서 급하게 토메사부로가 제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이사쿠, 이사쿠! 어디갔어! 그 말이 오늘따라 왜 이리도 바보같이 들리는지. 아까만 해도 우울하기 그지없었던 기분이 밝아졌다. 멸망한 도시 안에서 이런 행복을 즐기는 것도 모순적이지 않은가. 이사쿠는 생각을 그만두고 케마의 목소리를 따라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