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
5학년
보텐햐쿠텐
때 하나 묻지 않는 푸른 하늘, 때때로 지나가는 하얀 구름, 세상을 비춰주는 태양, 부드러운 바람. 하늘이 무섭지 않은 듯 쭉 뻗어 있던 건물은 어린아이의 신체도 제대로 가려주지 못할 정도로 부서져 바닥에는 잔해가 굴러다니고 있고, 사람들은 스마트폰으로 내일의 약속을 잡지 못하고 현재 상황만 간간이 엿들을 수 있을 뿐이다.
쓸만할 정도로 박살 난 스마트폰의 스피커 사이로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달 전의 상황이 반복으로 재생되고 있다.
「···―으로 시민 여러······는」 콰직.
“뭐 하는 거야”
타인에 의해 억지로 끊겨버린 방송에 고개를 들어보면 나긋한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라이조…. 가 아니었다. 하치야 사부로가 스마트폰을 밟은 채로 서 있었다.
인상을 찌푸린 채로 나직이 뱉는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 그런 질문을 하는 건 하치자에몽밖에 없지. 그러고 보니 요즘 하치자를 보지 못했네. 멍하니 들었던 고개를 내렸다. 위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오고, 시선 끝에 있는 많이 해진 운동화가 움직였다.
이 일은 5년 전에 갑작스럽게 일어나 현재에 이르렀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은 어렴풋하게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그만큼 그때까지의 기억은 지금 쓸 수 없는 것들이었고, 그걸 기억한다고 해도 지금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우리로서 그걸 어떻게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지금, 살아남는 것이 최우선으로 해야 할 것이었다.
언제 자버렸던 건지, 눈을 뜨니 부서진 창틀로 노을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찢어진 카펫 위로 불그스름한 빛의 부분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바닥에 손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문은 이미 부서져 있어 방에 나간다는 느낌보다는 통로를 한 차례 지나는 느낌에 지나지 않았다. 이곳에서 지낸 지도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지만, 일주일 동안 이곳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아,”
근처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라이조가 서 있었다. 아까와는 느낌이 다르게 포근하니까 라이조가 맞다. 요즘의 사부로는 지금까지의 일 때문에 매우 날카로워져 있었다. 도와줘야 하는데, 나도 지쳐서 누군가를 신경 쓸 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 일어났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이조의 말에 무언가 이상한 공백이 느껴졌다. 하지만 금방 신경 쓰기를 포기했다. 배고프기도 하고, 잠에서 막 일어났기 때문에 아직 머리가 멍했다. 아마 그 탓이겠지.
“아직 머리가 멍해. 배고파서 깬 거 같아. 어디 다녀왔어?”
“응. 사부로랑 같이 다녀왔어. 하치자에몽을 깨울 건데 같이 갈래?”
“아…. 좋아.”
고개를 끄덕였다. 잠에서 깰 심상으로 라이조를 따라 걷기로 했다. 하치자에몽은 내가 있는 층보다 더 위층에 있기에 어제보다 더 깨끗해진 계단을 걸어 라이조와 걸어 올라갔다. 아, 그런데, 라이조랑 사부로는 어디에서 지내고 있지. 우리 중에서 싸움에 가장 적합한 것은 하치자에몽인데 나보다 더 위층이란 것은 하치자에몽 외의 사람이 전투하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지금 우리 중에서 하치자에몽 외에 전투할만한 사람이 있나?
멍한 머리를 라이조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뚫려 있는 방 중에서 유일하게 문으로 막힌 방이 있었다. 똑똑, 하치자에몽의 상태의 확인차 한 행동이었다. 어차피 문은 잠겨있지 않으니 라이조는 바로 문손잡이를 돌리고 문을 열었다.
많이 망가진 매트리스의 위에 그나마 괜찮은 천을 뒤집어쓰고 누워있었다. 하치자에몽, 다정한 목소리로 라이조가 하치자에몽의 어깨를 흔들었다. 앓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은 채 일어난 하치자에몽이 주변을 살펴보는 듯싶더니 라이조를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
“이미 저녁이잖아….”
“미안해, 사부로랑 어디 나갔다 왔었거든,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니까 아래로 내려가야 해.”
라이조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비척비척 침대에서 내려온 하치자에몽은 아직도 잠이 가시지 않았는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내 어깨를 툭툭 치고 방 밖으로 나갔다.
워낙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라 그 이름이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익숙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하치자에몽을 따라 1층으로 내려가 보면 막 도착해 자리에 앉는 하치자에몽과 익숙한 뒷모습, 그리고 꽤 오랜만에 보는 듯한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지만, 반가운 기분은 들지 않았다.
“사정은 대강 들었어. 쵸지가 죽었다고.”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누군가의 사망 소식이었지만, 여전히 그 존재의 무게는 상당했다. 우리는 아직 미숙했고, 후배라는 자리에, 선배밖에 없는 자리에서 우리는 그저 보호를 받는 수밖에 없었다. 나카자이케 선배나, 나나마츠 선배가 그런 사람들이었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희생하는, 그런 사람들.
“..케마 선배, 그럼. 타치바나 선배는….”
나직이, 아직 모든 이야기를 듣지 못한 듯한 라이조가 조심히 물어보았다. 나카자이케 선배의 죽음에 혼란을 느끼는 듯한 케마 선배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였다. 우리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수백 번 마주한 것이 아니지만 그의 성격과 분위기로 따지면 어떤 상황인지 쉽게 유추해 낼 수 있었다. 타치바나 선배는 죽었다. 케마 선배를 대신해서, 그 사람 또한 희생한 것이었다.
케마 선배는 다리에 큰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제대로 걸을 수 없는 상태였었다. 지금에야 어느 정도 치료를 했기에 걸을 수 있지만, 그때 그 상황에서는 전혀 아니었다.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케마 선배를 미끼로 자기 혼자 살아남는 선택지는 타치바나 선배에게 없었을 거고, 상황이 반대였다고 해도 케마 선배도 똑같은 선택을 했겠지.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공기가 익숙하지 않은지 어디선가 작은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면, 5년 만에 처음 만나는 사람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타카마루씨.”
이름을 부르면 반가운 듯이 입을 뻐끔거리다 그대로 입을 다물고 손을 흔드는 타카마루씨가 있었다. 가만히 자리에 앉아 이야기가 끝나길 기다리다가 순간 졸아서 어딘가에 머리를 부딪힌 거 같았다.
“...사이토는 지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어….”
할 말이 많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니, 말이 나가지 않았다. 어째서? 왜? 말이 적은 사람이 아니었다. 쉽게 꺾이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건,
주위를 둘러보면 타카마루씨와 케마 선배, 시오에 선배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제야 지옥 같은 현실을 다시금 실감하게 되었다.
5년이라는 시간은 짧은 것 같았지만, 수많은 일이 일어나기에는 충분했다. 일본은 끝났고, 외국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우리들의 곁을 떠나갔다. 사이토씨를 포함한 1학년들은 수학여행을 가는 도중 고립되었고, 우리는 학교에 고립되어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몇 명이 살아있고, 다치지는 않았는지. 하지만 그 연락조차 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통신이 끊기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살아있다고 믿는 수밖에 없었고.
우리는 그사이 수많은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죽은 사람은 이사쿠 선배였다. 아직 많은 학생이 있었을 때의 시기였다. 불의의 사고로 다친 사람들을 구해주다가 운도 없이 무너지는 건물들에 깔려 같이 있던 사람들과 함께 죽은 거였다. 우리는 그 사람들의 사체도, 유품도, 아무것도 회수하지 못했고, 그것은 불과 1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사쿠 선배의 죽음 선배들 사이에 많은 불이익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사쿠 선배가 우리 사이에서 유일한 보건위였다는 것을 빼고는 우리한테는 그렇게 큰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선배들에게는 달랐다, 아주 처절하게. 브레이크를 밟아줄 사람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가장 크게 동요하는 건 예상외로 타치바나 선배였고, 그다음으로는 케마 선배. 나나마츠 선배와 나카자이케 선배는 오히려 더욱 냉정해졌고 시오에 선배는 의외로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케마 선배와 시오에 선배가 다투는 일은 줄어들었고, 그다음 희생자가 나타나자 두 사람은 싸우지 않게 되었다.
이런 것이 운명이라면, 우리는 수많은 죄를 짓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겠지, 이미 죽은 사람들이 지은 죄가 없어 이런 지옥을 겪고 있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그 목소리는, 두 눈을 감으면 들려오는 목소리에 의해 사라진다.
두 사람이 행복하게 대화를 하고 있고, 장난스럽게 들려오는 그 목소리들의 주제는 항상 뒤바뀐다. 음식일 때도 있고, 만화일 때도 있고, 숙제일 때도, 이성에 관한 이야기일 때도 있었다. 선생님, 친구들, 동물들, 우리들의 대화는 항상 그렇게 바뀌었다.
[괜찮아?]
눈앞에 쓰인 글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연스럽게 보이는 사이토씨가 웃으며 다시 한번 종이를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괘, 괜찮아요. 타카마루씨야말로, 괜찮은 거예요?”
네 명 모두 죽었거나, 실종되었거나, 반반이거나. 희망은 있는 듯 없었다. 이곳은 지옥이었다.
종이에 글씨를 끄적인 타카마루씨가 종이를 다시 들었다.
[모두가 떠나 설령 혼자가 된다고 해도 모두와 있던 시간은 나와 함께 있으니까.]
내 질문에 관한 답인 듯하면서도, 누군가를 달래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누군가가 자신일 수도 있었고, 나일 수도 있었다. 이 글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미였다. 마음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너와 함께 있던 시간은 두 눈을 감으면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지는데, 내 옆에는 이제 네가 없는 자리밖에 없다. 이것이 현실이고, 지옥이 아니면 무엇이겠어.
눈앞에 서 있던 타카마루씨의 표정이 서글퍼져 있었다.
“바로 이야기를 할 분위기가 아니라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라이조랑 저는 근처에 슈퍼에서 라디오를 고쳐서 소식을 얻고 있었어요. 대부분 허탕만 쳤었지만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있었고, 거기에서 이 앞에 안전지역에서 사람들을 데리러 오기 위해 헬리콥터가 올 거라는 소식이었어요.”
“이 앞이라고 하면?”
“...꽤, 멀어요. 쉬지 않고 걸어도 한 달 안에는 도착하기 힘들 거에요.”
“원래라면, 그 사이 안에 도착할 수 있었겠지만….”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었다. 밖에는 이성을 상실하고 생물들을 물어뜯는 동물들이 돌아다니고 있었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은 사이토씨와, 걷는 것이 자유스럽지 않은 케마 선배와 아직 상태가 회복하지 않은 하치자에몽까지. 우리가 라디오에서 들었던 그 장소로 가기까지는 최소 두세 달은 걸릴 것이 당연했다.
“언제까지 가야 하지?”
“.. 달에 한 번씩은 올 예정인가 봐요. 애초에 한 번에 많은 사람은 데려갈 수 없다며, 그 지역을 부가적인 안전지역으로도 만들 생각이라고 했어요. 아마 상태가 안 좋거나 어르신들은 헬리콥터로 데려갈 생각인 거 같아요.”
“..그래”
시오에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로가 한 라디오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한 달 안에 그 지역으로 갈 이유는 없었다. 느긋하게, 안전을 생각하며 나아가는 것이 가능했다. 시오에 선배는 며칠 정도 준비를 단단하게 떠나자고 했고, 우리는 그 의견을 반박할 이유는 없었다.
떠날 채비는 제법 빠르게 진행할 수 있었다. 하치자에몽은 상태의 호전이 일 순위라 많은 시간을 사이토씨와만 보냈고 케마 선배는 걸음이 불편한 것만 빼면 여전히 손재주는 좋았기에 많은 물건을 만들 수 있었다.
사이토씨는 준비를 도와주지는 않고 얌전히 하치자에몽과 기다리는 일을 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은 타카마루씨가 만일 다치기라도 하면 본인이 눈치를 챈다면 우리가 도와줄 수는 있겠지만 본인도 상처라면 대처가 늦어질 수도 있었고. 많이 낡은 것들이라 상처를 통해 감염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에게는 이사쿠 선배가 없고 이사쿠 선배처럼 의료에 해박한 사람은 없었다.
나흘 정도 걸려서 우리는 떠날 채비를 끝낼 수 있었다. 상태가 많이 호전된 하치자에몽과 시오에 선배가 앞장서 우리는 우리의 안식처에서 나왔다.
마음속에 구멍이 뚫려버린 것만 같았다. 한 달간 우리를 지켜준 건물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안전한 곳에서 나와 위험한 곳에 들어간다는 것 때문도 아니었다. 저 건물도 안전한 곳은 아니었기 때문이었고, 그냥.. 소중한 무언가를 놓고 와버린 불편한 기분이었다. 무언가를 빠뜨린..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자 타카마루씨가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종이에 글을 쓰지는 않았지만 괜찮다고, 우리가 있다고. 마치 내가 무언가를 두고 왔는지 알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