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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하나 크기의 종말

젠포우지 이사쿠

파랑 @nin_pharang

 

Youtube인지 뭔지 하는 걸로, 누군가가 실황중계를 하고 있다. 사실 여러 명이 동시에 실황중계를 하고 있지만. 전부 시청자는 0이다. 가장 위에 있는 실황중계를 클릭하자, 격양된 목소리의 남자가 바깥을 비추고 있다.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시끄럽지만, 표정과 목소리 톤으로 대충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안다. 그들은 지금, 로켓 속에 있다. 창밖은 어둡다. 휴대전화 밝기를 최대로 높이자 별이 가득 박힌 하늘이 보인다. 그들은 우주로 향하고 있다. 정확히는 달을 향해 가고 있다. 나를 제외하고서.

어느 날, 과학자들이 이야기했다. “이제 지구는 버티지 못합니다.” 라고. 그러자 정치가들이 물었다. “몇 년은 더 갈 것 같나?” 라고. 어차피 또 200년이나 300년 같은 터무니없는 큰 수를 부르겠지 싶었을 것이다.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대답한다. "길게 잡아봤자 5년 정도입니다." 라고. 운석이 충돌하는 거라면 차라리 나을 거라고. 제 명을 다한 지구가 사라져버릴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갑자기 닥쳐온 종말에 모두 당황했다. 한동안 지구는 아수라장이었다. 이렇게 될 것을 알았다는 환경 단체들. 아무 문제없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어디 먼 나라의 대통령. 이 모든 게 신의 뜻이라던 사람들. 슈퍼의 물건을 사재기하는 사람들. 그렇지만 그 사재기조차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얼마 안 가 슈퍼에는 오히려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게 되었다. 집단 자살 사건이나 테러도 끝없이 일어났다. 그렇게 인류는 제 손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의 수를 줄여버렸다. 그 이후, 정부가 대책이라고 내놓은 것이 <달 이주 계획>이었다. 직관적인 이름만큼, 내용도 단순했다. 얼마 남지 않은 인류를 로켓에 태워, 모두 달로 옮기는 것이다. 제로부터 시작하는 개척이 되겠지만 지금의 과학기술이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현재의 지구 이상의 문명을 이룩할 수 있을 거라고 정부는 자신했다. 각국의 정상들이 이 터무니없는 계획에 동의했는지, 아니면 소수의 의견을 듣기에는 남은 시간이 너무 짧았던 건지 계획은 착착 진행되었다. 민간인들도 제법 협력적인 태도를 보였다. 물론, 이번에도 나를 제외하고서. 왜냐면 어차피 내 목숨은 5년은커녕 1년도 버티지 못하니까. 지구가 끝나기 전에 인생이 끝나버린다. 인생이 6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았을 거라는 선고를 받았을 때 이미 평생 할 수 있는 당황스러움은 다 맛보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구에 남기로 했다. 딱히 그렇게 해도 상관없었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해주던 친척들이 각자 한 마디씩 건넨다. “정말 괜찮겠니?”, “네가 원한다면 같이 가도 좋아.”라며 나에게 찬스를 주던 사람들. “이사쿠, 고생해라.”라며 마음에도 없는 위로를 건네던 사람들. “그래, 한 명이라도 없는 게 낫지.”, 라며 무례한 소리를 하던 사람들. 모두 미소로 배웅했다. 5년 후면 지구가 멸망한다는 소리를 한 지 2, 3년 만에 로켓이 준비되었으니 앞으로 지구도 3년 정도 남았겠지. 나는 여기서 지구와 함께 죽고, 다른 건강한 사람들은 달에 착륙해 새로운 문명을 개척해 나가겠지. 그렇게 인류는 계속 살아갈 것이라고 믿었다. 실황중계 속 남자가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밖에 뭐야!?” 라고 소리치고, 큰 폭파 소리가 화면 가득히 찰 때까지는 그렇게 믿었다. 창밖을 보니 로켓의 잔해가 유성우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불에 타고 있는 잔해들은 아름답게마저 보였다. 그렇게 나는 지구의 마지막 인류가 되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인류는 앞으로 반년 정도면 죽는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몇 시간 간격으로 약을 먹어주지 않으면 반년은커녕 하루도 버티지 못하는 어느 환자가 그리는, 제한적이고 작은 종말의 이야기다.

 

첫 번째 달. 막상 혼자 남았는데도, 전혀 그런 기분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나는 늘 혼자였으니까. 그래도 일단 이것저것 머리를 굴렸다. 나는 정말 내가 마지막 인류일까? 혹시 생존자가 있다면? 나 말고 좀 더 건강한 사람이 있다면? 아니면 나처럼 병에 걸렸지만, 그래서 로켓에 타지 않았지만 나보다 건강한 사람이 있다면? 이 생각을 할 때까지는 아직 희망적이었다. 생각은 절망적이었을지 몰라도 일단 나는 희망적이었다. 그렇지만 사실은 알고 있다. 유일한 지구인이랍시고 전 세계에서 병실로 인터뷰를 하러 몰려왔으니까. 친척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동정했다. 가식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렇기 때문에 알고 있다. 단언할 수 있다. 생존자는 없다. 모두 불타 없어졌겠지. 로켓의 잔해가 가끔 가다 근처에 떨어져 큰 소리를 내는 것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개설되어 있던 실황 채널은 모두 없어졌다. 유일하게 연결되어 있던 채널도, 방금 막 끊어진 참이었다. 두 번째 달, 나는 병원 자판기로 향했다. 동전을 집어넣고 음료수를 뽑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종말은 자유와 닮아있었다. 건강에 좋지 않으니 안 된다고 하던 것들을 입에 넣었다. 자극적인 탄산과 혀가 아린 단맛이 났다. 오랜만에 맛본 자유는, 그렇게 썩 맛있지 않았다. 기침을 하며 나머지 음료수를 세면대에 흘려보내고 캔은 아무 쓰레기통에나 버렸다. 이제는 분리수거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나를 꾸짖을 사람도 없으니까.

그러기를 세 번, 네 번.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허비하며 맛도 없는 자유를 맛보다 질려 그냥 약을 먹고서 다시 병원 침대에 누웠다. 나를 제외한 인류가 전부 죽어 버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질려버렸다. 지구도 아마도 앞으로 2년 안팎. 지구의 수명이 줄어든 만큼 내 수명도 줄어들었겠지. 소리마저 죽어버린 것 같은 거리를 바라보며 나는 지겹도록 긴 하루를 꾸역꾸역 보내고 있었다. 이럴 거면 그냥 억지로라도 로켓에 타는 건데 선택을 잘못했다.

예전부터 그랬다. 운이 나빴다. 자주 넘어지고 다쳤다. 돈도 자주 잃어버렸다. 내 주변에 있으면 나쁜 기운이 옮는다고 사람들은 손가락질했고, 아이들은 그걸 믿었다. 믿지 않았던 유일한 아이가, 내가 감기로 결석한 어느 날 차에 치여 죽으면서 나는 점점 더 고립되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친척들 사이를 전전하고 있을 때 가슴에 통증이 있었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고, 불치병 판정이 내려진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좀 더 일찍 왔으면 살았을까요? 그런 바보 같은 질문에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TV채널을 돌린다. 제대로 나오는 채널은 하나도 없지만, TV마저 꺼지면 정말 아무 소리도 남지 않아서, 그게 무서워서 며칠 동안 켜놓았더니 고장이라도 난 건지 더 이상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 아직은 멀쩡한 이 세상에서 소리가 제일 먼저 죽었다. 그 다음으로 죽은 것은 시간 감각. 그냥 해가 지면 저녁을 먹고, 밤이 오면 잠을 자고, 충분히 잠을 잤으면 일어난다. 그것뿐이다. 창 밖 풍경은 변하지 않는다. 이제는 로켓의 잔해도 떨어지는 빈도가 줄었다. 가끔 길고양이들이 지나간다. 기지개를 켜고, 흘긋 이쪽을 보더니 다시 종종거리며 멀어진다. 저 고양이는 앞으로 몇 년 후면 자기들이 살 곳이 없어진다는 걸 알고나 있을까.

 

그리고 이제, 대충 어림잡아 5개월 쯤 지난 시점이다. 남은 목숨도 의사의 말에 따르면 앞으로 한 달 뿐이다. 정확히는 이십 며칠 정도 남았겠지. 약도 바닥을 보이고 있다. 그 날 이후로 제대로 잠을 잘 수 없게 되었다. 간신히 잠이 들 때면, 다음 날 일어날 수 있을지 걱정했다. 내가 자다가 갑자기 죽어버리면. 아니면 갑자기 지구가 멸망해버리면. 그렇지만 나는 매일 평소처럼 병원 침대에서 눈을 떴고, 죽음에 대한 감각마저 죽어버렸을 때, 나는 멍하니 창밖을 보다가 문득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곧 죽을 몸이라면 마음대로 해보자고 생각했으면서 막상 병원 밖으로는 나갈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바보같이도. 환자복과 병원 슬리퍼 차림으로 엘리베이터에 탔다. 1층에 도착해 문이 열리자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몇 월이지? 며칠이지? 계절은? 나는 아무 것도 궁금해 하지 않은 채로 남은 목숨을 허비해 왔나봐. 그렇게 생각하자 왜인지 웃음이 나왔다. 그저 햇빛을 받아 하얀 것이라고 생각했던 병원 앞길에 눈이 쌓인 것도 모르고 나는 그냥 그렇게 목숨을 허비했던 것이다. 발가락 끝이 시리고, 하얀 입김이 나온다. 천천히 발을 옮긴다. 언제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병원 아주 가까운 곳에 로켓의 잔해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던 기억이 있다. 그 모호한 기억에 의존해서 발걸음을 옮긴다. 살을 에는 것 같은 추위. 소복이 쌓인 눈을 밟는 소리와 숨소리만이 살아있는 세계. 병원을 오른쪽에 끼고 조금 걷자 주택가를 덮친 로켓의 잔해와 마주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거대하고, 웅장하기까지 한, 생명의 흔적. 가빠진 숨 사이로 왜인지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 와서, 그래, 이제 와서. 나는 내 목숨과 마주한 것이다. 내가 지금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것이다. 인류도 소리도 시간 감각도 살아있다는 것마저도 전부 죽어버린 이 땅 위에 오로지 나 혼자 살아있다는 사실을.

 

‘이사쿠.’

 

운이 나쁜 게 감기도 아니고 옮을 리가 없잖아, 하면서 나를 믿어주었던 그 아이가 어떻게 생겼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나는 어렸고, 좋았던 추억을 곱씹기에는 불행한 일만 연이어 일어났으니까. 내가 감기로 결석한 날 그 아이는 차에 치여 죽었다고 했다. 손에는 나에게 줄 편지가 들려있었다고 했다. 빨리 나아서 학교에서 보자, 고, 적혀있었다고 했다. 학교에 갔을 때는 그 아이를 볼 수 없었다. 가슴에 통증이 몰려와 땅에 손을 짚었다. 손가락에 눈이 감기듯이 파묻힌다. 슬퍼서가 아니라, 정말로 아픈 거다. 이렇게까지 멀리 올 줄 몰라서 약은 전부 병실에 두고 왔다. 이렇게 죽는 거야? 이렇게 어이없이? 이제야 내 생명과 마주하게 됐는데? 이제야 아픈 게 싫다고, 이제야 죽기 싫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는데? 이제야 살아갈 준비가 됐는데? 늘 그랬다, 나는 늘 운이 없었고…. 아니, 하지만, 만약 내가 건강했다면 나는 로켓에 탔을 거고, 그럼 폭발에 휩쓸려 죽었겠지. 이렇게 나를 마주할 새도 없이. 나는 불행한가? 아니면 행운아인가? 로켓에 타지 않은 걸 후회하고 있나? 그 어떤 질문에도 대답할 수 없었다.

통증이 잦아들고 나는 숨을 고른다. 다행히 잠깐 지나가는 통증이었던 모양이다. 다행이야. 비록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지만, 남은 시간동안이라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어. 오늘 나오길 잘했어. 그렇게 생각하고 돌아섰다. 그러나 내가 간과한 것.

운이 없는 사람은, 뭘 해도 운이 없다.

 

큰 소리에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정신을 차려보니 바닥에 누워있다. 하지만 병실이 아니다. 병원도 아니다. 나는 바깥에 누워있다. 커다란 로켓의 잔해가 나의 하반신을 누르고 있고, 피가 나고 있다. 로켓에 깔렸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상반신은 차가운데, 하반신은 흘러나오는 피로 뜨겁다.

눈이 와서 그런가 하늘이 예쁘다. 구름 한 점 없고, 짙은 하늘색이다. 여태까지 본 것 중에 가장 아름다운 하늘이라고 단언할 수 있어. 당연하지. 나는 내일의 하늘을 보지 못하고 죽을 테니까. 뭐가 됐던지 나는 내일을 그리워하고 어제를 후회하며 살겠지. 그렇지만 이제는 내일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늘을 바라보는 눈이 점점 감긴다. 차라리 병으로 죽었더라면 억울하지도 않지. 최후의 인류라는 타이틀을 가지고서, 고작 이런 식으로 죽는 건가.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몇 시간 간격으로 약을 먹어주지 않으면 반년은커녕 하루도 버티지 못하는 어느 환자가 그린, 제한적이고 작은 종말의 이야기. 혼자서 이야기하면 아무 재미도 없어서, 몇 번 하다 말았던 이야기들. 바보 같은 최후의 인류의 비참한 최후.

내가 아는 지구는 여기서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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