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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靑冥)

오하마 칸에몽, 쿠쿠치 헤이스케 위주 5학년

타마 @TAMA_899

 

 

 


 

추천 BGM

https://youtu.be/fVsDtG1y_Qs

 

 

그 날은 유난히도 맑은 날이었다. 학교에는 아침부터 이벤트에 당첨되었다며 모 브랜드의 신상 음료수가 배포되었다. 투명한 페트병에 담긴 라즈베리색의 탄산 음료... 퍽이나 남자 고등학교에 이런 음료를 배포한다며 주변 녀석들의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와중에도 딱히 받고 싶지 않다며 트럭을 지나쳐가는 헤이스케를 따르면 생각보다 괜찮다며 저들끼리 음료를 나눠먹고 있는 후배들이 보였다. 그 손에 쥐어진 탄산이 보글보글 올라오는 새빨간 병이 왜인지 꺼림칙해서 멍하니 보고 있자면 영어 듣기가 시작해버리겠다며 헤이스케가 제 옷깃을 잡아끌었다. 헤이스케와 함께 천천히 계단을 올라 도착한 교실에는 이미 이미 음료를 반 쯤 마신 동급생들이 천지였다. 개 중에 제게 음료를 권해오는 아이가 있었지만 ‘칸쨩, 탄산 끊는다며?’ 하고 저를 지나쳐 자리에 착석하는 헤이스케 덕에 거절하고 저도 헤이스케의 옆 자리에 앉아 영어 듣기 책을 폈다. 새빨간 라즈베리 색의 탄산 음료, 이상하게도 청명한 하늘. 오늘은 무슨 좋은 일이 있으려나? 생각하고 있으면 영어 듣기 방송이 시작된 탓에 칸에몽은 급하게 가방에서 펜을 꺼냈다.

 

 

 

 

。。。

 

 

 

 

2교시가 시작되었을 무렵이었다. 뒷자리가 이상하게 소란스러웠다. 교탁 앞에 서계시는 선생님의 표정도 이상하게 굳어버리셔서 고개를 돌린 곳엔 흥건한 피와 하나 둘씩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제 동급생들이 있었다. 이게 뭐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거야?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교내 방송이 울려퍼졌다. 

 

[안내합니다. 무증상자들은 당장 강당으로 집합해주십시오. 쓰러진 사람과의 접촉을 금합니다. 혈액과도 접촉하지 마십시오. 안내합니다.  무증상자들은 당장...]

 

교실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정숙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들렸지만 칸에몽은 옆자리 헤이스케의 손을 붙잡고 교실을 나섰다. 상황을 처리하기 바쁜 뇌 속에서 딱 하나 확실하게 깨달은 것이 있었다. 이것이 만약에 ‘감염병’이라면 학교 내의 그 누구도 안전하지 않을테다. 강당에 전원이 집합하는 것은 자살 행위리라. 급하게 계단을 내려가 도착한 보건실은 누가 꾸며낸 듯한 정적 뿐이었다. 사람이 더 몰려들기 전에 서랍장을 뒤져 마스크와 라텍스 글러브를 찾아끼고 있으면 복도가 소란스러웠다. 다들 강당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리라 대충 짐작한 칸에몽은 헤이스케의 손을 잡아끌었다. 헤이스케의 본가는 이 곳에서 멀었다. 기숙사를 쓰는 헤이스케는 당장 갈 곳이 없었다. 그렇다면 근방의 제 집으로 데리고 가는 수 밖에 없었다. 보건실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건물 밖으로 빠져나가려고 하면 쿠쿠치-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헤이스케와 꽤 친하게 지내던 동급생이었다. 칸에몽은 고개를 돌려 대답하려는 헤이스케를 억지로 잡아끌었다. 

 

“대답하지 마.”

 

헤이스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발장에서 운동화로 갈아신고 곧장 정문으로 달렸다. 집으로 가는 길이 어떠했더라. 곳곳에 피범벅인 시체가 한가득인 탓에 점점 피로 물들어가는 헤이스케의 새하얀 운동화를 보면서 저는 어떤 생각을 했더라. 제 본가 근처에 도착해서야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마트로 발을 돌렸다. 피범벅인 카운터를 지나 생필품을 저와 헤이스케의 가방에 우겨넣었다. 부모님은 무사하실까? 학교는 지금쯤 어떠한 상황이지? 그러고 있으면 제가 헤이스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 줄도 몰랐다.

 

“칸쨩.”

 

헤이스케가 작게 속삭였다. 미안해. 내가 딴 생각을 하느라... 손에 힘을 풀고 사과하면 헤이스케가 살짝 고갯짓을 했다. 뒤에서 다른 발소리가 들렸다. 긴장한듯 제 손을 쥐어오는 헤이스케를 안심시키려 눈으로 살짝 웃어보이면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일순 어깨를 잡히고 굳어버린 헤이스케의 뒤 쪽으로 발차기를 해 사람을 떼어내고 곧장 제 집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 시간대에는 가정부 아주머니도 계시지 않을테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대문부터 잠궈버린 후 기척을 살폈다. 그 이후로 잔뜩 긴장해 굳어버린 헤이스케의 옆에서 지문 인식을 풀고 제 집 안으로 들였다. 익숙치 않은 공간에서 뻣뻣하게 굳어버린 헤이스케를 현관에 그대로 두고 걸쇠까지 걸어 문을 잠군 후 집의 모든 창문이란 창문을 잠구고 커튼까지 친 후 현관으로 돌아오면 정체 모를 손이 닿았던 부분을 멍하게 응시하는 헤이스케가 있었다. 아- 헤이스케의 저런 알 수 없는 표정은 처음인데. 무엇을 말해야 좋을까. 무엇을 말해야 헤이스케가 안심 할 수 있지?

 

“입은 옷은 비닐에 넣어서 묶어버리고 바로 샤워하자. 헤이스케, 괜찮을거야.”

 

울듯한 헤이스케의 얼굴을 보고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은 정말 형식적인 것들 뿐이라서 이런 자신한테 환멸이 났다. 몇 번을 괜찮다고 되뇌었을까. 샤워하러 천천히 욕실로 발걸음을 옮기는 헤이스케의 뒷모습을 확인한 후 저는 다시 집을 나섰다. 오면서 확인한 가장 가까운 약국에서 마스크며 라텍스 글러브, 소독제며 알코올을 커다란 스포츠 백에 우겨넣었다. 이후의 외출은 불가피해질테다. 그것을 대비해야 했다. 슬슬 헤이스케가 다 씻을 시간이려나. 약국을 나와 돌아가는 걸음을 빨리하면 스포츠 백을 노리고 달려드는 사람이 몇 있었다. 혹시 몰라 챙겨온 망치를 휘둘렀다. 뼈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미친듯이 달렸다. 뒤를 쫓던 사람들이 사라진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조심스럽게 도어락을 풀고 현관에 발을 들이면 흠뻑 젖은 머리가 엉망인 헤이스케가 있었다. 씻고 나왔는데 제가 없어서 온 집안을 헤맨 모양이었다. 저를 보고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는 것이 퍽이나 이상해 제 몰골을 확인하면 손이며 교복이 피범벅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씩 가까워져 제게 닿으려고 하는 헤이스케에게 반사적으로 말했다.

 

“곧장 부엌 가서 비닐 장갑 끼고 와. 몇 번 와봤으니까 위치는 알지?”

“...응.”

 

헤이스케가 쭈뼛쭈뼛 부엌으로 사라졌다. 그제서야 호흡을 가다듬었다. 미친듯이 달린 탓에 머리가 멍했다. 비닐 장갑을 끼고 돌아온 헤이스케가 제가 건넨 가방을 받아들었다. 무언가 말하려는 헤이스케의 말을 끊고 곧장 욕실에 틀어박혔다. 하수구로 흘러들어가는 붉은 피를 보면서, 칸에몽은 소리 죽여 울었다. 칸에몽이 욕실까지 남기고 간 핏자국을 보면서 헤이스케는 제가 포기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칸에몽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제가 여기서 포기해서야 되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칸에몽이 쥐어준 스포츠 백을 열어 마스크를 뜯어서 끼고 소독제를 바른 후에 몇 번 와본 적 있었던 기억을 더듬어 락스를 찾아냈다. 고무장갑을 끼고 핏자국을 깨끗이 지워냈다. 인터넷에 검색해 알코올을 물에 희석해 칸에몽이 가져 온 물품들을 표면 소독했다. 그러고 있자면 피에 젖은 교복을 비닐에 우겨넣은 칸에몽이 욕실에서 나오더니 헤이스케를 보고 웃었다. 마스크에 고무 장갑, 분무기며 걸레를 손에 들고 청소에 열심인 헤이스케를 보고 긴장이 풀린 모양이었다. 그 날 저녁, 돌아오지 않는 부모님께 전화를 했지만 결국 소리샘으로 넘어가버리는 것을 확인한 칸에몽이 건조하게 말했다. 너 밖에 안 남은 모양이야. 칸에몽의 그 말 뜻을, 당시의 헤이스케는 이해하지 못했다. 학교에서 나올 때에 살아서 강당 쪽으로 달려가던 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보면 소리샘으로 넘어가버려서 학교도 전멸했다는 사실만 확실해졌다. 의도치 않은 감금 생활에 슬슬 익숙해질 무렵에 인터넷이며 SNS로 관련 정보를 모았다. 확실한 사실은 정부는 이미 붕괴되었고 고위 책임자들은 해외로 도피했다는 것. 누군가 머리를 뒤에서 친 기분이었다. 헤이스케의 본가가 있던 구역은 이미 초토화 된 지 오래라는 듯 했다. 그 사실을 확인한 헤이스케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저번 달부터 가족과 연락이 안 된 건 이것 때문이었구나. 그렇게 말하고선 고개를 돌려버린 헤이스케에게 칸에몽은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다들, 죽어버렸던 거야.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선 결국 울어버리는 헤이스케를 말 없이 토닥였다. 한 달 전부터 연락이 되지 않는 가족에 대해서 헤이스케가 제게 말해준 적은 없었다. 한 달 간, 헤이스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컵라면에 물을 부어 협탁으로 가져가면 눈가가 발개진 헤이스케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

 

 

 

 

그 밀폐된 공간을 나섰던 것은 2달 후, 식량이 거의 바닥났을 무렵이었다. 수도도 전기도 무사했지만 TV에서 나오던 속보가 끊겨버린 탓에 휴대폰으로 외부 상황을 확인하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조심스럽게 대문 밖으로 발을 옮기면 말라붙은 피 범벅인 시체가 여러 구 널부러져 있어서 둘은 구역질이 나는 것을 억지로 참아냈다.

 

“칸쨩, 이렇게까지 해야 해?”

 

제 옷깃을 살짝 잡아끄는 헤이스케를 안심시키듯 칸에몽이 되뇌었다.

 

“괜찮아. 할 수 있어.”

 

그렇게 되뇌인 칸에몽이 손에 쥔 망치를 고쳐잡으면 헤이스케도 몽키스패너를 세게 쥐었다. 그 간 물자가 바닥나기 시작한 탓에 생존자 간의 싸움과 물자 약탈이 심화된 모양이었다. 둘은 약국부터 들러 응급약과 소독제를 챙겼다. 원래 약학부를 지망하던 헤이스케의 말에 따라 약품을 챙겨 약국을 나서려고 하면 덩치 큰 남자가 뒤 쪽에서 칸에몽을 향해 달려드는 것이 눈에 보여서 헤이스케는 이를 악물고 곧장 몽키스패너를 휘둘러 남자의 머리를 쳐냈다. 헤이스케가 그렇게 곧장 반응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못한 탓에 잠깐 굳어있던 칸에몽이 정신을 차려보면 피가 뚝뚝 떨어지는 몽키스패너를 손에 쥔 헤이스케가 덜덜 떨다가 눈물이 잔뜩 고인 얼굴로 입을 열었다.

 

“칸쨩, 나, 사람을...”

“괜찮아. 헤이스케 덕에 내가 살았잖아.”

“...응.”

 

라텍스 글러브를 낀 손으로는 헤이스케를 토닥여주지도 못했다. 헤이스케는 점점 선명해지는 시야에 들어온 다정한 칸에몽을 확인한 후 몽키스패너를 고쳐잡았다. 이후에는 예의 건에서 헤이스케의 관심을 멀어지게 하기 위해서 방독면도 구비해놓는 편이 안전하니, 그런 것을 어디서 구하니 하며 작게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구더기가 들끓는 시체 옆을 지났다. 역한 냄새가 마스크를 뚫고 들어오는데도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히 관심을 그런 곳으로 돌렸다가 생존을 포기하게 될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 점점 근방의 상점가가 가까워질 무렵에 커다란 총성이 울렸다. 시선을 마주한 둘은 도가 되든 모가되든 확인부터 해보자는 생각에 곧장 총성이 울린 방향으로 달려나갔다. 그러한 생각과는 달리 도착한 곳에 서있던 엇비슷한 나이의 고등학생 셋을 보고 굳어버렸지만은. 전염병이 돌고 있는 탓에 섣불리 접촉도 하지 못하고 양 쪽 다 상대방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으면 어렴풋이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한 헤이스케가 입을 열었다.

 

“...사부로?”

 

상대방도 약간의 정적 끝에 입을 열었다.

 

“헤이스케.”

 

 

 

 

。。。

 

 

 

 

하치야 사부로는 사격 유소년 국가대표라고 했다. 헤이스케와 같은 진학 학원에 다녔고, 그 탓에 학교는 달라도 꽤 절친한 사이라고 했다. 그래봤자 지금 상황에선 외부인 아니냐며 퉁명스럽게 말하는 칸에몽에게 잠깐 이야기라도 나눠보고 싶다고 하는 헤이스케의 얼굴에는 묘한 결의가 서려있어서 칸에몽도 조심스럽게 헤이스케를 따랐다. 셋은 헤이스케와 칸에몽이 원래 다니던 사립 학교의 근방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에 다니는 모양이었다. 바이러스가 발발했을 당시에 둘의 학교처럼 음료수 행사 차가 학교에 와서 음료를 배포했고 2교시 즈음 반 아이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헤이스케가 제 입을 틀어막고 말했다.

 

“그거 완전 우리랑 같은 상황이었잖아...”

“알아보니까 거의 모든 고등학교가 이런 식이었어. 라이조는 그 음료에 무언가 섞여있었던 것 같다고...”

“...하긴, 이 상황에서의 공통 분모는 그 음료수 밖에 없지. 무언가 더 아는 정보는?”

“우리가 생활하는 수도 도쿄 이외에는 이미 초토화 된 지 오래라는 것. 도쿄는 방어선을 구축해 버텨오다가 이번에 뚫려버린 모양이야.”

“...수도 이외에 초토화 되었다는 사실도 우린 몰랐는데.”

“우리도 얼마 전에 안 사실이야. 도쿄 이외에는 인터넷을 차단하고 물자 공급도 끊어버린 지 오래였던 것 같아. 지금만 해도 벌써 바이러스 변종이 나오기 시작한 것 같고.”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것 아냐?”

“아니, 수도 이외 지역이 초토화 된 것도 우리랑 같은 바이러스인 모양이라서. 헤이스케는 못 봤어? 수가 적긴 하지만, 피를 줄줄 흘리면서 돌아다니는 사람.”

“우리는... 모르겠어. 사부로...”

 

헤이스케와 칸에몽은 굳어버렸다. 우리는 이리도 폐쇄적인 생활을 이어왔던가? 이 셋이 어떻게든 살아갈 방도를 찾는 동안 우리는 안전한 장소에서 구조를 기다리며 연명 할 생각만 했단 말인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둘을 확인한 사부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쉘터라는 게 있는 모양이야. 얼마 전 만난 생존자가 의료 단지 부근을 중심으로 해서 쉘터가 존재한다고 했어. 그 곳에 들어가려면 바이러스 키트 검사 후 2주간의 격리를 마쳐야만 한대. 우린 조만간 소문의 쉘터로 이동할거야. 너희는 어쩔거야?”

 

이야기를 듣고 망설이기 시작한 것은 헤이스케였다. 머리 속으로 여러가지 경우의 수를 상정하는 모양이었다. 잠시간 골똘히 생각하는 듯 했던 헤이스케는 수 분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이 정도의 사태에, 쉘터가 만들어졌다고 해도 그게 건재하다는 보장이 있어? 우리가 갔을 때에 사살 당할지도, 가는 중에 보균자를 여럿 만날텐데 지금보다 상황이 더 나아지리라는 보장이 있어? 사부로, 너는 그렇게 불확실한 것에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이었어?”

 

헤이스케가 담담히 뱉어낸 대답을 들은 사부로가 제 머리를 쓸어넘기고 말했다.

 

“이 열악한 환경에서 아사하거나 감염되어서 죽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라고 보는데. 하기야, 너희는 도련님들이니까 우리처럼 극단적으로 생존하지 않았겠지.”

 

그렇게 뱉고 헤이스케와 곧장 싸울 기세인 사부로를 제지한 것은 라이조였다.

 

“쿠쿠치처럼 생각하는 건 당연해. 그리고 의견이 다른 것에 아까운 체력을 쓸 필요도 없다고 봐.”

 

그 말과 동시에 밖에서 ‘깡’하는 소리가 울렸다. 직후 피 묻은 쇠파이프를 들고 고개를 들이민 하치자에몽이 어색하게 여기도 이제 안전하진 않겠다며 되뇌이면 칸에몽이 작게 헤이스케의 귀에 속삭였다.

 

‘이 셋, 믿을만한 건 확실해?’

‘사부로는 저래봬도 내 친구야. 사부로가 데리고 다니는 둘이라면 자세한 건 몰라도 믿을 만하다고 생각해.’

 

조곤조곤 대답하는 헤이스케를 확인한 후 칸에몽이 결심했다는 듯이 벌떡 일어서서 입을 열었다.

 

“쉘터로 떠날지 결심은 못 했지만, 떠날 준비를 하는 기간에는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내도 좋아. 나도 헤이스케처럼 정확한 정보 없이는 떠날 수 없다는 입장이기도 하고. 대신 조건이 있어. 너희가 보균자가 아니라는 확증이 없으니 일주일 간은 너희가 2층, 우리가 1층을 사용했으면 해. 일주일 간 서로 정보를 모아서 결정을 내리도록 하자. 여기에 너희가 불리한 조건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칸에몽의 말을 들은 셋은 잠시간 의논하더니 결정을 내렸다. 결국 적은 짐을 챙긴 셋과 함께 가방의 남는 공간에 통조림 류를 우겨넣고 헤이스케와 칸에몽은 집으로 돌아왔다. 조건 좋은 곳에서 생존하고 있었냐며 비꼬는 사부로와 순수하게 감탄하는 둘을 두고 칸에몽은 경계를 풀지 않은 채로 중문을 열었다.

 

 

 

 

。。。

 

 

 

 

일주일 간 모은 정보로 확실해진 것은 쉘터의 위치, 생존자를 쉘터로 운반하는 듯한 지프 차가 돌아다닌다는 사실. 최근에도 그런 목격담이 있었으니 아마 쉘터에 대한 것은 더 이상 의심 할 것도 없는 사실이리라. 문제는 운전 면허도 없는 고등학생 다섯이 어떻게 걸어서 이틀은 족히 걸리는 6구역의 쉘터까지 안전하게 가느냐는 것. 바이러스는 초반에만 극한 치사율을 보였고 지금에 와서는 순환기가 망가지고 제정신이 아니라도 움직이는 사람들이 꽤 보였다. 거의 좀비와 다름 없는 상태. 뇌에도 직접적인 영향이 가는 바이러스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듯한 행동을 보면 그건 분명한 사실이겠다. 일주일이 지나고 거실에 모인 다섯은 작전을 논의했다.

 

“바이러스가 치사율이 높던 시기는 진작에 지났고 오히려 지금이 전보다 위험한 것은 굴지의 사실이야. 이 상황에서 이틀은 족히 걸리는 쉘터에 어떻게 안전하게 도달할 수 있지? 차라리 여기에서 기다리는 게 안전할 수도 있어. 이동 도중에 생필품이 동난다면 어떻게 대처할건데?”

“활동 반경을 넓히고 사용량을 줄여서 버틸 수 있는 만큼 버티면서 구조를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긴 해. 그게 지금까지 우리가 해왔던 것이잖아?”

“그건 방법이 그것 밖에 없었을 때의 상황이고. 쉘터가 확실히 존재하는데 이런 기다림을 이어갈 필요가 있어?”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잖아. 이틀만에 도달할 수 있다는 건 너무 교만한 생각이야. 감염된 사람들을 피하면서,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면서 우회하다보면 시간이 몇 배로 걸릴텐데 괜한 개죽음을 하게 되는 거 아니냐는 소리야.”

“야, 오하마.”

“내 말이 틀렸어?”

“칸쨩, 그만해. 둘 다 너무 예민해졌어. 둘 다 맞는 말이고 시간도 있으니까 천천히 결정하자. 응?”

“...헤이스케는, 헤이스케는 어쩌고 싶어?”

“어...”

“헤이스케한테 떠넘기지 마.”

“사부로, 난 괜찮아. 둘 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 예의 지프가 계속 생존자를 찾는다면 우리가 있는 곳 근처에도 오겠지. 지금까지 이 근처에서 지프를 목격했다는 사람 본 적 있어? 계속 여기서 지내왔던 우리보다는 너희한테 그런 소문이 잘 들려왔을 거 아냐.”

“아니, 없었다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왔었다면 이 곳에 다시 오지 않을 확률이 더 크니까, 차라리 목격 정보가 없는 게 우리 입장에선  이득일 수도.”

“맞았어, 사부로.”

“그럼 타협점을 찾자. 바로 떠날 수 없다는 건 굴지의 사실. 준비 할 것도 많고 감염이 정확히 어떤 루트로 이루어지는지도 알 수 없으니 최대한 호흡기를 막고 상처 노출도 피하는 게 좋아. 변종이 나타난 이상 감염 경로가 늘어났다고 봐도 이상할 건 없어.”

“감염자와의 접촉은 최대한 피하자. 출혈이 가장 큰 증상인 이상 생채기에라도 닿으면 정말 감염 될 수도 있으니까. 다들 긴 팔, 긴 바지를 두께가 있는 것으로 입고 행동하는 걸로 하자.”

 

결론은 지프를 기다리는 것. 기한은 2주, 그 안에 지프가 오지 않는다면 다섯이서 쉘터로 떠나기로 했다. 지프가 언제, 어디로 올지 모르는 상황이기에 이전에 라이조, 사부로, 하치자에몽 셋이 지냈던 그 건물을 거점으로 교대로 주변을 돌기로 했다. 일주일 째 되던 날, 그 날의 불침번은 저와 칸에몽이였다. 조명 하나 없는 곳에서 망치와 몽키스패너를 들고 주변을 살피고 있자면 새까만 짚업을 여민 칸에몽이 말했다.

 

“만약 쉘터에 간다면, 헤이스케는 뭐부터 하고 싶어?”

“뜬금없는 질문이네.”

“그렇게 말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거 있어?”

“갑작스럽게 그런 질문을 받아도 생각해둔 게 없는데... 지금은 너랑 살아남는 것 밖에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그래?”

“응. 칸쨩은? 하고 싶은 거 있어?”

“나도 당장은 너랑 살아남는 것만 생각해.”

“역시, 그렇게 되지?”

“응. 그렇게 되네.”

 

그 날 밤은 길었다. 필요한 물품을 보충하러 들어 간 가게에서 감염자와 조우했기 때문이었다. 곧바로 온 공격을 피한 후 망치를 휘두른 칸에몽을 좇아 들어간 가게에서 보았던 것은 텅텅 빈 매대와 토막난 시체였다. 굳어있는 저를 본 칸에몽이 곧장 제 팔을 잡아 가게를 벗어났지만 헛구역질이 나서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건물로 돌아와 숨을 고르는 와중에도 토막난 시체가 생각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헛구역질을 하는 제 등을 천천히 두드려주던 칸에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슬슬 피가 말라붙어 굳어가던 망치를 다른 손에 쥐고, 제 호흡이 안정될 때까지 제 등을 두드려줄 뿐이었다. 칸에몽은 집으로 돌아온 후 날이 갈수록 예민해져갔다. 사부로와 둘이서 그 건물에 다녀온 이후로는 더욱이. 이제 불침번은 질렸다고 했다. 밥을 먹으러 나오지도 않았다. 칸에몽이 방에 틀어박힌지 사흘째 되던 날은 비가 왔다.꼭 약속한 2주의 마지막 날이었다. 칸에몽의 방문 앞에 저녁거리를 두고 돌아 온 거실에서 물을 마시던 사부로에게 넌지시 물었다.

 

“최근에 칸쨩이 이상한데 아는 것 있어?”

 

사부로는 물을 입에 마저 털어넣고서는 비릿하게 웃어보였다.

 

“그 녀석한텐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좋아, 헤이스케. 어쩌면 쉘터에도 가지 못 할 걸.”

“그게 무슨 소리야?”

“그 녀석, 다쳤거든. 멍하니 있다가 감염자인지도 모를 사람한테 각목으로 맞았어. 움직이지도 못 했으니 최소 골절일거야.”

“...농담도 가려서 해.”

“내가 너한테 농담을 할 거라고 생각해? 헤이스케, 최근엔 불침번이 된 적 없지? 왜라고 생각해?”

“모르겠는데...”

“오하마가 널 감싸고 돌아서야. 근방의 생존자들이 더 거칠어졌어. 이전보다 더 한 물자 싸움에, 눈에 들어 온 생명체는 일단 죽이려고 들고 본단 소리야. 조만간 이 집도 뺏길 것 같고.”

“뭐?”

“얼마 전 하치가 다락방 쪽에서 망을 보다가 플래시를 켜고 이 근방을 배회하는 사람을 몇 보았다고 했어. 우리가 이 곳에서 생활한다는 사실이 까발려진거겠지. 오하마 녀석, 이 집에 남으면 확실하게 감염자들한테 당할 걸.”

“...”

“가지마. 오하마가 너만은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어.”

 

칸쨩, 칸쨩. 문을 두드려봐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쾅쾅 문을 세게 두드리고 있자면 빗소리 사이로 엔진음이 들렸다. 2층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후와가 급하게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지프라고 했다. 분명히 지프라고 했다. 손에 감각이 사라져갔다. 울음이 났다. 칸쨩, 칸쨩...

 

“같이 가자. 같이 살아남자. 칸쨩, 제발...”

“헤이스케, 미안해. 난 못 가.”

“네가 다친 건 상관 없어! 가서 치료해달라고 하면 되잖아! 뭐가 문제야?!”

“...그 때, 잠깐 마스크가 벗겨졌어. 접촉도 했고. 내가 감염되었는지 아닌지도 몰라.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 그래도, 너만은 살리고 싶었어. 혼자서 가. 내 몫까지 살아남아.”

“그딴 건 상관 없어! 같이 가자! 제발....”

 

계속 문을 두드리고 있으면 건너편에서 칸쨩이 문이 흔들릴 정도로 세게 문을 쳤다.

 

“헤이스케, 부탁이야. 응?”

 

물기 어린 칸쨩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두드리던 것도 멈추고 굳어있으면 만약을 대비해 미리 싸두었던 가방을 든 사부로가 성큼성큼 다가와 가지 않으려는 저를 잡아 끌었다. 칸쨩을 두고 갈 수는 없다고 고갯짓을 하며 버텨봐도 사부로에게 질질 끌려갈 뿐이었다. 눈물 범벅으로 잔뜩 흐려진 시야에 언뜻 비친 사부로가 제 얼굴을 잡아 소리를 치는데 무엇 하나 귀에 들어오는 단어가 없었다. 억지로 마스크를 씌워지고 질질 끌려 간 밖에서, 붉은 피가 흥건한 도로 위에 세워진 지프가 보였다. 하치자에몽이 쇠파이프를 들고 길을 뚫고 있었다. 사부로가 제 손을 고쳐잡고 말했다.

 

“헤이스케, 나도 오하마랑 한 약속은 지켜야 하거든. 쟤는 널 살리겠다고 그렇게까지 했는데 네가 포기해서야 되겠어?”

“...”

“가자. 살아남자. 어떻게 되든 해보자.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잖아.”

 

마스크에 가려진 사부로의 표정이 어땠더라. 울고 있었나? 이후에는 곧장 지프로 달렸다. 질척질척한 바닥에 신발 밑창이 가라앉았다. 급하게 지프 시트로 뛰어들면 곧장 따라 탄 사부로가 문을 닫고, 반대쪽으로 돌아 온 하치자에몽도 쇠파이프를 던지고 문을 닫았다. 조수석에 타있는 라이조가 눈에 들어왔다. 결국 칸쨩 말고는 다 떠나는거구나. 커다란 칸쨩의 집으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게 어렴풋이 보였다. 뭐가 네 몫까지 살란거야. 꼭 연결된 사부로의 손이 싫었다. 칸쨩을 구하지도 못한 주제에 꼴에 자랑스럽다는 듯이 제 실력을 자랑하던 사부로가 싫었다. 숨 죽여 울고 있지만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운전석에 있는 사람이었다.

 

“난 나나마츠 코헤이타. 쉘터의 파견 제 1팀 소속. 이 차는 쉘터로 간다. 너희의 신원을 밝혀.”

 

방독면 너머로 먹먹한 소리가 울렸다. 손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시야가 점점 선명해졌다. 순서대로 소속 고등학교와 반, 이름을 대기 시작했다. 마지막은 저였다.

 

“도쿄 제 5구역 사립 S 고등학교 소속, 3학년 1반 쿠쿠치 헤이스케입니다.”

 

앞 좌석에 탄 남자가 패드를 만지작거리더니 액셀을 밟았다. 도시가 멀어져갔다. 칸쨩이 멀어져갔다. 네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갈 이유를 찾아야만 했다. 

 

 

 

 

 

 

 

 

에필로그

추천 BGM

https://youtu.be/0Uhh62MUEic

 

 

 

 

 

 

쉘터에 들어오고, 원체 잘 굴러가던 머리로 연구실의 수습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대개 하는 일은 백신 개발 팀의 주축인 젠포우지 씨의 보조. 나카자이케 씨에게 정리된 논문을 받아 젠포우지 씨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고 바이러스의 작용 기전을 알아내기도 했다. 안전한 쉘터에서 인정 받으며 살아감에도 제 뇌리에 박혀 떨어지지 않는 것은 그 날의 칸쨩이었다. 굳게 닫힌 문 너머로 떨리던 칸쨩의 목소리, 문을 살짝 두드려보면 신경질적으로 문을 쾅 치고선 가라고 소리 치던 칸쨩. 가끔 사부로를 만났다. 보안팀에서 퍽이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높게 지어진 방벽 위에서 저격을 담당하고 있다고 했나. 은근한 자신감이 서린 톤이 묘하게 칸쨩을 닮아서 화가 났다. 우리 넷 사이에서 칸쨩에 대한 화제는 금기였다. 그 짧디 짧은 생존 기간을 따져보면 칸쨩에게 미련을 남긴 것이 나뿐인 것도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파견팀에서 일하는 하치자에몽에게 예의 도시에 가보았냐고 물으면 하치자에몽은 어색하게 웃어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 대답이 진실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사실 가보지 않았다는 것이 제게 있어서 다행인 사실일지도 몰랐다. 만약에 하치자에몽이 예의 집에 가서, 칸쨩의 죽음을 확인했다고 하면 저는 당장에라도 무너져내렸을테다.

그 날은 이상하게도 꼭두새벽부터 젠포우지 씨의 호출이 있었다. 연구가 늦어져서 새벽 두시 즈음에 귀가한 판이었는데 새벽 다섯시에 연락을 받고 연구복을 갖춰입고 있으면 헛웃음이 났다. 어째, 밖에서 죽기 살기로 생존하던 때가 더 마음이 편했던 것 같기도 하다. 갓 끓여낸 커피에 냉수를 타 속에 털어넣고 나서야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세한 사항은 몰라도 꼭두새벽에 호출 할 정도라면 위급한 건이겠지. 자기 전 확인하던 논문들을 가방에 우겨넣고 연구실로 달렸다. 

 

 

 

 

。。。

 

 

 

 

 

도착한 연구실엔 냉기가 감돌았다. 퇴근 할 때와 다름 없는 헝클어진 머리의 젠포우지 씨께 인사를 하면 쿠쿠치 군, 좋은 아침이야. 하고 사람 좋은 얼굴로 웃어보이며 제 품에 채혈 키트를 안겨주셨다. 뜨거운 에스프레소를 담은 잔을 손에 든 이사쿠 씨는 한껏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면역인이 하나 있다고 했다. 어느 정도의 직위나 권한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는 금지 구역에 격리된 무균실에서 지내고 있다고 젠포우지 씨는 줄곧 말해왔는데, 그 면역인의 채혈을 제게 맡기셨다. 저 같은 수습생이 그러한 일을 해도 되냐고 물으면 쿠쿠치는 우수하니까. 다녀 와. 하고 살풋 웃어보이실 뿐이라서 저는 준비된 채혈 키트를 들고 금지 구역으로 향했다. ID 카드 권한 등록은 이미 해두었으니 그냥 가기만 하면 된다고 떠밀려진 출입 금지 팻말이 크게 붙여진 복도 쪽, 조금 더 걸어가 제게 주어진 ID 카드로 출입 권한을 해지하고 철문을 밀어열고 도착한 새하얀 공간의 유리 벽 너머에는 새하얀 검체용 옷을 입고 웅크려있는 형체가 있었다. 그런데 저는 그 형체가 너무나도 익숙해서 잠시간 굳어있다가 천천히 유리 벽을 두드리면 고개를 든 얼굴과 시선이 맞닿았다.

 

”...칸쨩.”

[헤이스케...]

 

헐렁한 소매 아래로 비친 마른 팔에 시퍼렇게 든 멍들과 주삿바늘 자국을 보고선 울음이 났다. 저를 보고선 새하얗게 질린 입술로 활짝 웃어보이는데, 네가 그 지경이 되어놓고도 내가 살아있다는 게 그리도 기쁘냐고 묻고 싶은 것을 꾹 눌러참았다. 유리 벽 너머로 손바닥이 맞닿았다.

 

[같이 살아남자고 했잖아.]

 

먹먹한 목소리로 칸쨩이 활짝 웃어보였다.

 

 

 

https://youtu.be/f1z50Ddno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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