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까막나라의 열하룻강아지
토키토모 시로베 - 불개
르멩 @LEUMENG
달까지 사라지자 까막나라의 백성들은 추위에 메말라갔다.
마음은 얼어붙고, 말에는 고드름이 돋았으며, 시선에는 서리가 내려앉았다.
마침내 궁궐의 침전까지 냉기가 스며들자 왕은 화견(火犬)을 불러들였다.
해와 달을 물어와다오.
다시 빛을 끌어와다오.
세상이 밤과 낮을 잃었던 시절의 일이었다.
"근데 해는 어떻게 생겼어요?"
"그냥 딱 봤을 때 아 얘가 해구나 하는 걸 물어오면 돼!"
"아니, 전하… 그걸 그렇게 설명하시면 어떡해요."
"우리 시로베는 할 수 있어! 이케이케 돈돈이다, 알지?"
"이, 이케이케,"
"그거 안 따라해도 돼!"
제에에에발 일할 때만이라도 체통을 좀 지켜달라며 울부짖던 타키야샤마루가 다시 시로베에게로 몸을 돌렸다. 여전히 갸웃거리는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 어깨에 손을 짚었다. 이 조막만한 애를 혼자 어떻게 보내나 걱정이 태산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믿는 수밖에 없었다. 까막나라는 서쪽 끝, 지상과 지하의 경계에서 매 나절 해와 달을 번갈아 땅 너머로 내려보낸다. 동쪽에서 다시 떠오르게끔. 그렇게 새 하루를 시작하는 역할을 수행해왔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해가 벌써 십 년이 넘도록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달마저 얼마 전에 갑자기 사라져버린 거다. 세상이 완전히 엉망이었다.
"미안하다, 시로베. 마음 같아서는 내가 가고 싶지만 알다시피 내가 없으면 왕궁은… 개판이라서."
"네에……."
"그리고 산노스케를 보내기엔… 알다시피 걔는…."
"네에에……."
시로베는 야심차게 임무를 떠나서는 길을 잃고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산노스케를 상상했다가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역시 저가 생각해도 자신이 가장 적임자인 것 같았다. 더군다나 자신은 불을 삼켜도 끄떡없는 불개 아닌가. 분명 해나 달도 한입에 물어올 수 있을 거다. 걱정 마시라며 어깨를 펴보였더니 타키야샤마루는 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두우니 조심하고, 감기 들지 않게 옷도 잘 챙겨 입고, 모르는 사람 조심하고, 무모한 짓 하지 말고, 전하 말은 다 흘려들으라고 걱정 섞인 잔소리를 구구절절 듣고 노잣돈까지 한 움큼 떠안은 뒤에야 시로베는 떠날 수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성 밖으로 나와 흙길을 걸었다. 작은 불덩이를 야무지게 입에 물고, 짚신에 시선을 고정하고 뚜벅뚜벅 걸었다. 이 작은 불도 이렇게나 밝아서 저 위 나뭇가지를 빛으로 적시는데 해는 도대체 얼마나 밝은 건가 싶었다. 세상이 밤으로 잠긴 후에 태어난 시로베에게 나무는 원래 앙상하고, 하늘은 원래 캄캄하고, 날씨는 원래 추운 거였다. 옷을 입지 않아도 어깨까지 포근한 기분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아무튼 계속 걸었다. 해도 달도 매일 동쪽에서 떴으니 그쪽으로 가면 잠들어 있는 해와 달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게 왕궁 사람들의 의견이었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별을 따라 동쪽으로 열심히 걸었다. 그러다 배가 고프면 왕궁 사람들이 챙겨준 곶감을 먹었고, 외로워지면 나나마츠 왕의 외모를 본따 만든 인형을 갖고 놀았다. 마침내 동쪽으로 가는 길목, 인적 드문 갈림길에 설 때까지 시로베는 하루도 쉬지 않았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지. 입을 헤 벌리고 눈을 깜빡거려도 답이 나오지 않아서 철푸덕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리니 갑자기 며칠 쌓인 피로가 밀려오는 듯했다. 고개를 들어 별자리를 살펴보면 왼쪽 길은 북동쪽, 오른쪽 길은 남동쪽인데 두 길 모두 지평선 너머로 옅은 빛이 보였다. 뚫어져라 눈을 크게 뜨고 응시하던 시로베는 왼쪽 빛이 더 밝다는 결론을 내렸다. 왼쪽으로 먼저 가야겠다. 우선은 조금만 쉬고. 나뭇가지를 주워 계속 물고 있던 불을 내려놓는다. 모닥불이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불규칙적인 소리에 너무 졸음이 몰려들어서 아주 조금만 눈을 감기로 했다. 딱 백까지만 세고 일어나려던 다짐과 달리 한번 감은 눈꺼풀은 천근만근이었다. 결국 시로베는 쉰도 세기 전에 단잠에 빠져들었다.
'알았지? 너무 무리하면 안 돼.'
'그래! 여차하면 해나 달 같은 건 버려버려.'
'예? 아니 버리는 건 좀,'
'그런 사소한 것보다 시로베가 훨씬 중요하다는 뜻이야. 알겠냐?'
'….아무튼 무사히 돌아오는 게 최우선이다, 시로베.'
어깨를 두드려주고 머리를 쓰담아주는 손들이 좋았다. 그래서 꿈도 춥진 않았다. 환청이나 기억일 게 분명한 목소리들을 듣다가 시로베는 불현듯 눈을 떴다. 분명 보여야 할 건 하늘인데 웹 시커먼 그림자가 제 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멍하니 3초쯤 정적이 흐르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람 빠진 비명이 샜다.
"으어어어…?
"어… 으아아아…."
조금 떨어지자 상대의 얼굴이 서서히 드러났다. 제 또래 정도로 보이는 작은 체구에, 새까만 갓에 새까만 도포를 입은 상대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안색을 확인한 시로베는 부리나케 불을 물어다가 상대와 조금 더 가까운 곳에 옮겨놓았다. 얼마나 잔 거지. 얘는 누구지. 고개를 들었지만 불빛 때문에 별이 잘 보이지 않았다. 깜깜한 세상에서는 별을 관찰하기 전까지 시간을 짐작할 수가 없으니 얼마나 잤는지도 몰랐다.
"…나 안 추운데."
"얼굴이 새하얀데…?"
"그건 원래 그래."
"왜? 아파?"
걱정, 혼란, 놀라움, 약간의 두려움까지 적나라하게 스쳐지나가는 시로베의 눈을 보자 귀신이라고 장난을 쳐볼까 충동이 일었다. 아주 잠시 고민했지만 역시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아니, 나 저승차사거든."
"…저승차사?"
"응. 견습이지만."
이름을 하니와 세키토라고 밝힌 상대는, 혼자 쓰러져 있길래 데려가야 하는 사람인지 확인하려던 것 뿐이라며 실례를 사과했다. 정중한 모습에 경계는 풀렸지만 그래도 저승차사라는 이름은 무시무시해서 어깨가 살짝 떨렸다. 그러다 뒤늦게 자기소개를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아차 싶어 이름이며 나이, 어디서 왔는지까지 조잘조잘 늘어놓았다.
"까막나라면 서쪽 끝 아니야? 꽤 멀 텐데."
"응…. 그렇지."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
"어… 나는…."
말해도 되나? 그래도 왕명인데 기밀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고민하니 하니와가 고개를 갸웃한다. 묘하게 읽을 수 없는 눈빛이 어쩐지 신뢰가 가서 천천히 숨을 쉰다.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저승차사라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고, 나쁜 애 같지도 않고. 괜찮지 않을까? 시로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해랑 달을 찾아야 해."
짧은 정적이 흘렀다. 하니와도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지금 세상은 좀 비정상적이긴 해."
"그렇게 이상해? 난 원래 세상을 못 봐서."
"나도 뭘 정확히 아는 건 아니지만…."
하니와가 양팔을 펼쳤다. 두 손도 각각 주먹을 쥐어 허공에 두었다.
"해와 달, 양과 음, 빛과 어둠, 그런 것들 있잖아. 생과 사도 마찬가지거든."
균형이 잡혀야 제대로 순환이 돌아가는데 지금은 계속 삐걱이는 느낌이야.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바로잡으면 좋겠지. 하니와의 설명은 나뭇가지가 타들어가는 소리 탓에 더 경고처럼 들렸다. 시로베는 갑자기 샘솟는 사명감에 힘차게 주먹을 따라 쥐었다. 역시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시로베는 이만 가봐야겠다고 외치고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입에 물었다.
"근데 해랑 달은 어떻게 가져가게?"
"어? …그냥 물어서 가져가면 되는 거 아니야?"
하니와는 턱을 괸 채 검지로 제 볼을 톡톡 두드리다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시로베에게 건냈다. 얼떨결에 받아들어 살펴보니 금으로 만든 방울이었다. 어쩐지 으스스한 기운이 도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그걸 흔들면 딱 한 번, 중도에 다녀올 수 있어."
"주, 중도?"
"흔들면 중도로 가고, 다시 흔들면 인계로 돌아오고. 하늘길에 올려놓으면 알아서 동에서 서로 흘러가지 않을까?"
그렇게 중얼거리며 웃는 얼굴을 두고 시로베는 말문을 잃었다. 중도는 천계와 인계의 경계에 있는 길을 말했다. 영혼이 저승으로 떠날 때도 그 길을 따르고, 타키야샤마루가 말하길 해와 달도 그 길을 통해 동에서 서로 이동한다 했다. 그러니 중도에 올려둘 수 있다면 굳이 까막나라까지 가져가지 않아도 되긴 하다. 한눈에 봐도 평범한 물건은 아닌 것 같은데 선뜻 자신에게 주는 이유를 시로베는 알 수 없었다. 다시 돌려줘야 하나 허둥대는 사이 하니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로베가 다급하게 물었다.
"이런 걸 왜 나한테 주는 거야?"
"음… 그냥? 친구가 되고 싶어서."
또 봐, 시로베. 다시 한 번 묻기도 전에 상대는 사라졌다. 뭘까. 뭐지? 아직도 영문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선물이니까 소중히 갖고 있기로 했다.
길 끝에 가까워질수록 빛은 점점 커졌다. 이제는 물고 왔던 불도 필요가 없고 외려 더워서 옷을 한 꺼풀씩 벗어야 했다. 앞을 보면 눈이 부셔서 손그늘을 만들어야 할 지경이었다. 시로베는 작은 돌그릇에 불을 얹어두고 길목에 두었다. 어둡지도 않고, 춥지도 않고. 계속 들고 다니기엔 번거로우니 나중에 돌아올 때 챙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다시 길을 떠나기 전 잠시 위를 쳐다봤는데, 왜 어른들이 옅은 파랑색을 하늘색이라고 블렀는지 이제야 납득했다.
마침내 동쪽의 끝과 북쪽의 끝 사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협곡의 지역에 도착한 시로베는 입구에서부터 잔뜩 화가 난 기합소리를 들었다. 곧이어 상황을 파악할 겨를도 없이 앞에서 달려온 누군가에게 멱살을 잡혀야 했다.
"잡았다, 이 도둑놈!"
"으어, 에?"
"문답무용!"
다짜고짜 질질 끌고 구석진 동굴로 들어가서는 뚫어져라 쳐다본다. 키는 저와 비슷한데 왜 내려다보는 느낌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자세히 보니 사람은 아니고 웬 사자 같은데, 왜 화가 난 거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기세가 워낙에 흉흉해서 덜컥 겁이 났다. 그래도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으나 이어진 질문에 다시 쏙 다물고 말았다.
"너, 해를 훔치러 왔냐?"
시로베는 당황해 입을 틀어막았고 상대는 그걸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얼굴이 더 울그락불그락해지더니 붙같이 화를 낸다.
"너! 너 같은 놈들 때문에 해가 사그라들고 있다고!"
"난 그냥…"
"시끄러워! 기껏 숨겨놨더니 여기까지 어떻게 알고!"
숨겼다고? 해를 숨긴 게 자기라는 얘긴가? 여전히 무섭긴 했지만 가만히 밀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숨겼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해를 찾았다는 뜻 아닌가.
"너… 너는 누구야? 네가 해를 숨겼어?"
"다 알고 왔으면서 뻔뻔하긴!"
"몰라! 난 그냥 세상이 깜깜해진 게 싫은 거 뿐이야!"
"…뭐?"
그제야 상대는 몸을 물리고 시로베와 눈을 마주쳤다. 동그란 눈매 둘이 씩씩대며 서로를 응시하다가 차츰 진정했다. 먼저 손을 내민 건 시로베였다.
"나는 까막나라에서 온 불개 토키토모 시로베야. 해랑 달을 되찾으러 왔어."
"나는… 노세 큐사쿠다. 무례를 사과하지."
"해는 왜 숨겼어? 지금 밖은 춥고 어두워서 다들 힘들어해."
"그건, 몰랐어. 정말로."
정확히 말하자면 해를 숨긴 건 내가 아니야, 나는 그 뒤에 태어났으니까. 큐사쿠는 천천히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큐사쿠의 말에 따르면 해가 하늘에 있던 시절, 불순한 목적으로 그 힘을 탐하는 자들이 판을 치자 선악을 수호하는 해태 일족이 해지기를 자처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부정한 기운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고 결국 태양빛이 회복될 때까지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 숨겨두자는 결론이 나왔는데…
"…그게 도리어 세상에 해가 될 줄은 몰랐어. 미안해."
"그럼 지금 다른 해태들은 어디에 있는데?"
"해를 지키고 있지. 난 어려서 가까이 가진 못하지만."
"어린데 왜 가까이 못 가?"
"…아직 그 열기를 견딜 만큼 강하지 않다는 말이야! 자존심 상하게 이런 얘기까지 해야겠냐?"
큐사쿠는 화를 냈지만 시로베는 안심했다. 이야기를 들어줘서 다행이었다. 큐사쿠의 안내를 따라 절벽 사이로 들어가며 해치 일족에게도 동의를 얻고, 어깨를 포근히 감싸는 따스함을 느끼고, 마침내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눈부신 빛을 눈에 담았을 때까지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정말 왕이 말한 대로 누가 봐도 해였다. 그러나 시로베는 한 가지 문제에 맞닥뜨렸다.
"세상에, 물! 물 가져와!"
"꼬마야, 괜찮니?
"뜨거워요!"
너무 뜨거웠다. 불보다도 훨씬. 게다가 불처럼 주먹만할 줄 알았더니 주먹은 주먹인데 나나마츠 왕의 주먹이라서 입을 와악 벌려야 했다. 야심차에 입에 물었다가 그만 혀를 데이고 만 시로베는 찔끔 눈물을 흘렸다. 이걸 어떻게 까막나라까지 가져간단 말인가. 하늘길에 올려둔다 치더라도 거기까진 또 어떻게 물고 간단 말인가. 나나마츠 왕은 해가 이렇게 뜨거운 거라고 왜 말을 안 해줬을까. 그 사람이야 근성이니 기합이니 사소한 건 신경쓰지 말라느니 어쩌니 하더라도 타키야샤마루 보좌관은 얘기해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몰랐나? 누군가 얼음으로 응급처치를 해줄 동안 시로베는 오만 가지 억울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무튼 방법을 찾긴 해야 한다. 시로베는 얼음을 녹여먹으며 그늘진 곳으로 피신해 있던 큐사쿠에게 다가갔다.
"큐사쿠, 이거 지게에 담을 수는 없을까?"
"지게가 타버릴걸."
"물에 넣고 식히면 안 돼?"
"이거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어차피 태양불은 물로 꺼지지도 않아!"
"화 내지 마…."
불이 꺼지지도 않으면 어떻게… 까지 생각하던 시로베는 멈칫했다. 불? 불이라면 물 수 있지 않나? 아까는 한입에 물어서 데였던 걸 수도 있지 않나? 얼음을 마저 먹고 오도도 달려가 태양에서 흘러나오는 불길을 살짝 끄트머리만 물어보니 아니나다를까 하나도 뜨겁지 않았다. 무겁고 뜨거워서 까막나라까지 끌고 가는 건 무리겠지만 중도까지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시 달도 이렇게 무겁냐고 해태들한테 묻자 달은 더 작고 덜 뜨겁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시로베는 잠시 고민하다가 하니와가 준 방울은 역시 지금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시로베는 잘 가라는 큐사쿠의 인사에 말로 대답하진 못하고 힘껏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는 방울을 꺼내들었다. 맑은 소리가 대여섯 번쯤 울리자 시야가 일그러지며 몸이 붕 떠오르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이도 꽉 악물어서 해를 놓친 염려는 없겠다고 무의식 중에 생각했다. 발에 아무것도 채이질 않으니 허공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온몸을 감싸는 은근한 짓눌림 탓에 눈을 뜰 수도 뭔가를 들을 수도 없었다. 태양이 뿜어내는 더운 열기가 아니었다면 잠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시로베는 어느 순간 서늘함을 느꼈다. 분명 더워야 하는데 왜지? 반사적으로 눈을 뜨자마자 압박감이 사라진 것도 마침내 도착했다는 것도 단박에 실감했다.
"와아…."
온통 새까만데 어둡지는 않은 곳이었다. 미묘한 보랏빛, 그림자 같은 푸른빛, 그리고 송송이 떠 있는 하얀 별들. 감탄하느라 입을 헤 벌리자 물고 있던 해가 톡 떨어졌다. 떨어뜨릴까 봐 놀란 시로베가 다급히 다시 잡으려 보니 신기하게도 해는 허공에 그대로 떠 있었다. 그러더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서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마치 정해진 순리라는 것처럼. 시로베는 그 신비로운 광경을 빤히 쳐다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이리저리로 돌렸다. 반짝거리는 별 하나에 손가락을 얹어보자 눈부신 별가루가 묻어 나왔다. 너무 예뻐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어서, 시로베는 별 몇 개를 품에 챙겼다. 돌아가서 궁에 있는 식구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다.
계속 구경하고 싶었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았다. 이번에 가면 다시 못 올 텐데,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 번 더 방울을 흔들자 같은 과정을 거쳐 인세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정확히 북동쪽과 남동쪽으로 나뉘었던 그 갈림길에 말이다. 해가 다시 생겨나 하늘은 환하고 날씨는 따뜻했다. 그래서 왼쪽 길에 두고 온 불도 더는 필요가 없었다. 시로베는 힘을 잃은 방울을 품에 챙겨넣고,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출발했다.
길의 끝에 도착할 즈음엔 해가 거의 넘어가서 불그스름하게 노을이 지고 있었다. 노을이라 해도 동쪽에서는 잘 보이질 않아서 시로베가 마주한 하늘은 검보랏빛이었다. 땅이 뚝 끊긴 대신 드넓은 바다가 펼쳐져 한 줌 남은 햇빛이 파도를 따라 잘게 부서지고 짠 바람이 코를 간질였다. 짙푸르게 찰랑이는 바다 아래에서, 세상 가장 큰 반딧불처럼 예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여기 달이 있는 건 확실한데 대체 어떻게 들어가야 하나 고민하던 순간, 누군가 시로베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뭐 해?"
"어, 으, 으아아…!"
말을 걸어온 상대는 놀라서 휘청거리는 시로베를 잡아주려다가 그만 같이 물에 빠지고 말았다. 둘은 허우적허우적 땅을 붙잡아 기어올라가서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난 뒤에야 통성명을 할 수 있었다.
"아, 진짜 운도 없지…."
"괘, 괜찮아?"
"대충. 근데 넌 누구길래 여기 있어?"
"나는 까막나라에서 온 시로베인데…."
상대의 이름은 카와니시 사콘이었다. 달나라에 사는 달토끼로, 달이 없어지고 나서는 달나라도 완전히 비상이라고 했다. 그럼 사는 곳이 사라진 거냐는 질문에 인계의 달과 자신들이 사는 달은 다른 곳이지만 힘이 이어져 있다고 답해 주었다.
"사실 달이 어디 있는지도 누가 훔쳐갔는지도 뻔하긴 한데…."
"저기 있는 거 아니야?"
"맞아. 어떤 막무가내인 자식이 들고 들어가버렸어."
"누가?"
"…이케다 사부로지라고 달두꺼비 하나 있어."
허구한 날 인계로 내려와서 바다 밑으로 내려가더니 이번엔 아예 돌아올 생각도 않는다고, 사콘은 걱정 섞인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근데 난 수영도 못 하는데 저길 어떻게 쫓아가서 끌고 나오냐고!"
발버둥을 치며 분개하던 사콘은 별안간 벌떡 일어나 바다 속에다가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야! 사부로지! 야! 나와! 안 나와? 시로베도 뭔가 같이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이름을 무작정 따라 외쳤다. 사, 사부로지! 나와줘! 사부로지! 난 시로베라고 해! 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지나고, 물 속에서 드디어 사부로지가 고개를 내밀었다.
"아, 좀! 그만 좀 불러!"
"너 당장 달 꺼내와!"
"싫어!"
이글이글 투닥거리는 사이에 시로베가 살포시 끼어들어 말을 건넸다.
"저기, 사부로지."
"뭐야. 넌 또 누구야?"
"난 까막나라에서 온 시로베야. 혹시 달은 왜 가져간 거야?"
사부로지는 입을 쭉 내밀고 아무 말이 없다가 톡 쏘듯 대답했다.
"…보여주려고."
"보여줘?"
"너흰 바다 밑에 들어와본 적 없지?"
"내가 거길 어떻게 들어가!"
"넌 좀 조용히 있어!"
다시 싸우려는 토끼와 두꺼비를 진정시키고, 시로베는 겨우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달나라의 작은 바다에서 태어난 사부로지는 인계의 넓은 바다에 종종 내려왔는데, 바닷속도 환하고 반짝이는 달나라와 달리 인계의 바다는 깊이 내려가면 어둡고 척박하기만 하다고, 그래서 달을 훔쳤댄다. 인계의 심해에 사는 친구들에게 예쁜 빛을 보여주고 싶어서.
"그럼 보여줬으니까 다시 가져와!"
"아, 걔네가 너무 좋아한단 말이야!"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시로베는 품에 있는 별을 만지작거렸다. 정말 가져가고 싶었지만 그래도 달이 더 중요하니까. 머뭇거리다 큰 결심을 하고, 아쉬움을 애써 물리고 시로베는 별들을 꺼내 내밀었다.
"그럼 이거랑 바꿔주면 안 돼?"
사부로지는 별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시로베는 뒤늦게 달나라에는 혹시 별도 있는 건가 싶어서 긴장했지만 사부로지는 그 별을 받아들였다.
"…이거 별이야?"
"어? 응."
"그렇게 내키진 않지만, 달을 계속 저기 둘 수도 없으니까 뭐…."
"너 그냥 그거 마음에 들었다고 솔직히 말해라?"
"아니거든!"
사부로지는 잠시만 기다리라며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갔는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도망친 것처럼 보였다. 마음에 든 게 부끄러워할 일인가? 좋은 거 아닌가? 그냥 빨리 보여주고 싶었던 건가? 잘 모르겠다. 조금 뒤 사부로지가 가지고 나온 달은 정말 예뻤지만….
"차가워!"
너무 차가웠다. 시로베는 달을 입에 물자마자 퉤 뱉어버렸다. 해는 불이라도 물 수 있었지 차가운 건 정말 먼역이 없다. 안절부절 못하고 있으니 사콘이 툭툭 시로베를 건드렸다.
"그거 그냥 내가 갖다 놓을까?"
"진짜?"
"나야 뭐 어차피 가는 길이니까."
"안 차가워?"
"난 달에 사는걸 뭐."
그럼 이제 전부 끝났다. 이제 궁으로 돌아가면 된다. 무사히 성공했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빨리 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고, 잘했다고 칭찬도 듬뿍 받고 싶었다. 시로베가 신나게 인사하고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사부로지가 붙잡는다.
"너 다시 서쪽까지 걸어가게?"
"응."
"멀지 않아?"
"멀어."
사부로지는 제 등을 떡 가리키며 자신 있게 제안했다.
"내가 바닷길로 금방 데려다 줄게!"
"어? 진짜?"
"거짓말 같아? 빨리 등 잡아."
시로베가 조심조심 등을 잡자 사콘은 재밌다는 얼굴로 한숨을 쉬고 손을 흔들었다.
"잘 가, 시로베. 사부로지 넌 혼날 각오 하고."
"너 자꾸 왜 시비냐?"
"잘 가, 사콘!"
짧은 인사를 끝으로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물길을 가르는 내내 시로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느 샌가 사콘이 달을 돌려놓은 건지 하늘은 달빛 별빛으로 휘영청했고, 바다도 그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 찰랑거렸고, 머리카락을 스치는 바람은 엄청 시원했다. 사부로지가 팔다리를 휘저을 때마다 물살의 색이 변했다. 까만색, 은색, 파란색, 옅은 보라색, 그리고 뒤를 돌아보면 샛붉은 주황색. 해가 뜨고 있었다. 태어나 처음 보는 일출이었다.
"나 절대로 혼나는 거 무서워서 늦게 가려고 너 태워준다 한 거 아니다?"
"응."
"별 갖다준 보답도 아니다?"
"응, 고마워!"
물에 젖어도 춥지 않았다. 아침 햇살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부드럽고 따뜻했다. 이제 까막나라의 사람들도 다시 따뜻해질 거다. 돌아가면 모두 웃으면서 반겨줄 거다. 마지막으로 사부로지와도 인사를 나누고, 시로베는 집을 향해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