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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나고 싶어의 단 上 

젠포우지 이사쿠 - 츠쿠모가미

짜부 @jjibujjabu

  큐짱. 창고의 구급상자에 붙은 이름이다. 용구위원회 고문인 요시노 선생은 상자를 살피더니 이게 100년, 아니 99년쯤 된 상자라고 말했다. 그럼 100년이 채워지면 츠쿠모가미가 되는 거예요? 야마무라 키산타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 자리에 있던 건 용구위원 전부였지만 겁을 먹은 건 1학년 후쿠토미 신베와 시모사카베 헤이타 뿐이었다. 어디선가 고양이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등불이 일렁였다. 헤이타는 닌타마들의 흔들리는 그림자를 보며 신베의 옷깃을 붙들었다.

 

  얼마 안 가 1학년들은 창고 안에 있는 99년 된 상자를 ‘큐짱’이라고 불렀다. 구급상자(きゅうきゅうばこ)에서 따온 건지 숫자 九에서 따온 건지 모르겠다. 다들 그렇게 부르니까 어느 순간 3학년인 토키토모 사쿠베와 4학년인 하마 슈이치로도 그렇게 부르더니, 용구위원회 위원장인 케마 토메사부로까지 따라 불렀다.

 

  “어이, 사쿠베. 비가 올 것 같으니까 큐짱은 맨 윗 선반에 올려놓도록.”

 

  용구위원회가 모두 돌아가고 토메사부로는 마지막으로 남아 마무리 확인 작업을 했다. 무기 개수가 하나씩 안 맞았다. 쿠나이가 하나, 촌철이 두 개가 모자랐다. 어디 다른 데 섞여 있는 건 아닌가 해서 둘러보다 큐짱한테서 시선이 멈췄다. 어떻게 상자가 이렇게 오랫동안 멀쩡할 수가 있지. 토메사부로가 처음 발견했을 때 거의 버려지다시피 했던 물건이었다. 이상한 상자. 토메사부로는 어딘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장부를 펼쳤다.

 

  그때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분명 어디서도 사람의 기척이 없었는데 순식간에 주변에 누군가가 다가와 있었다. 숨소리를 죽인 채 이쪽을 주시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토메사부로는 두 번째 선반 위에 장부를 올려두며 주변을 경계했다. 눈빛이 매서웠다.

 

  “정체를 밝혀라! 승부다!”

 

  한 사람이 아닌 건가. 소리가 한 곳에서 나지 않았다. 멀리서 조그맣게 났다가 아래에서 났다가 하더니 마지막으로 큐짱 쪽에서 덜컥거리며 큰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둔탁한 무언가가 토메사부로의 머리를 내리쳤다. 크게 충격을 받은 토메사부로는 그대로 바닥을 향해 쓰러졌다. 머리를 부딪쳐 시야가 흐려졌다. 눈앞으로 무언가의 실루엣만 언뜻 비쳤다. 뚜껑이 열려 바닥을 구르는 큐짱과 나마쿠비 피규어였다. 점점 정신이 아득해졌다. 빛을 잃어가는 시야 사이로 사쿠베가 어른거렸다. 상자를 밟고 올라가 어렵사리 큐짱을 제자리에 두려고 했던 사쿠베. 키가 모자라 바들바들 떨리던 손. 혼자 할 수 있다고 말하던 목소리. 토메사부로는 사다리를 하나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눈을 뜨자 방이었다. 온몸이 뻐근해서 살펴보니 머리와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분명 창고에 있을 때만 해도 해가 떠 있었는데 지금은 등불이 곁을 밝혔다. 옆에선 니이노 히로카즈 선생이 탕약을 달이느라 부채로 불 조절을 하고 있었다. 니이노는 눈을 뜬 토메사부로를 보고 더 쉬라며 손짓했다.

 

  “아, 몬지로가 고생 많이 했으니까 내일 일어날 만하면 찾아가 보고.”

 

  니이노가 숨을 골랐다. 늦게까지 포복전진훈련을 하던 회계위원들이 창고 문이 열린 걸 봤으니 망정이었다, 회계위원장인 시오에 몬지로는 창고 바닥에 흥건한 피를 보자마자 그를 둘러업고 보건실로 향했다. 곧바로 보건위원회의 치료를 받았으면 좋았을걸. 평소와 같이 보건위는 불운으로 정신이 없었다. 약재서랍까지 엎어져 분류해 놓은 약재들이 이리저리 섞였다. 환자를 누일 자리는 물론 없었다. 니이노가 재빠르게 다가와 토메사부로의 상태를 살폈다. 몬지로, 당장 토메사부로의 방으로 안내해주겠니. 6학년 기숙사로 향하는 니이노와 몬지로의 발걸음이 다급했다.

 

  “또 어디 아프면 곧장 선생님 불러야 한다. 넘어지면서 머리를 심하게 다쳤으니까. 며칠 동안은 임무에서 제외할 테니 편히 쉬렴.”

 

  교직원 기숙사로 돌아갈 시간이 되자 니이노는 손바닥만 한 포대 하나와 사기그릇을 토메사부로의 머리맡에 두고 나갔다. 3일 치 약재와 탕약이었다. 혼자 남은 토메사부로는 이불 속에서 뒤척였다. 불안했다. 몸이 아파서 그런 것보다 쉬고 있는 동안 실력이 뒤쳐질까 봐 걱정스러웠다. 제대로 쉬지 않으면 몸이 더 상하는 걸 알고 있어도 그랬다. 토메사부로는 두꺼운 이불을 목 아래까지 끌어올리며 초조함을 억누르려 애썼다. 혼자인 방이 웬일로 휑하게 느껴졌다. 의지가 되는 형들과 가족이 그리운 밤이었다. 토메사부로는 이미 오래전에 떠난 동실자들을 생각하며 가림막 건너편을 응시했다. 가족에게도 말 못 할 아픔이 있을 때, 임무로 지쳤을 때 힘이 되어주었던 그들이 그리웠다. 부질없는 생각이 자꾸만 잠을 방해했다. 몸이 약해지니 정신도 약해진 건가 싶었다.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누군가 마당의 풀을 밟고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곧 문이 벌컥 열렸다.

 

  “떠매사부로!”

 

  토메사부로가 으어억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니이노 선생님이 돌아오신 줄 알고 있던 탓에 평소보다 배는 놀랐다. 아까 창고에 있던 닌자인가. 토메사부로는 다치지 않은 팔로 쿠나이를 잽싸게 집어 들어 올리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상대 닌자한테선 공격할 기세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토메사부로는 벽 쪽으로 움직이며 점점 간격을 벌렸다. 여차하면 창문으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이번에도 부주의하게 굴었다간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지도 몰랐다. 6학년 닌복을 구해 변장한 것을 보면 상대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토메사부로, 다친 건 좀 어때? 약재는 일찍 구해왔는데, 말려둔 붕대가 날아가서 찾아오느라 좀 늦었어. 니이노 선생님은 가셨구나. 달여 주신 약은? 마셨어?”

 

  남자는 무방비한 얼굴로 어깨에 메고 있던 상자를 내려놓았다. 어디를 구르다 왔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흙투성이라 방안을 걸어 다닐 때마다 나뭇가지며 나뭇잎이 후드드 떨어졌다.

 

  “네놈은 누구냐?”

 

  남자가 맹숭하게 토메사부로를 쳐다보다가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그러다 뭔가 알아챈 듯 ‘나야, 나! 젠포우지 이사쿠!’ 라고 하며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토메사부로는 거리를 좁혀오는 이사쿠를 향해 쿠나이를 겨눴다. 하마터면 무기의 날카로운 끝이 이사쿠의 목젖에 닿을 뻔했다. 눈앞의 얼굴이 꽤 억울해 보였다. 정말 우리가 아는 사이였던 것처럼.

 

  “설마 기억을 잃은 거야 토메사부로? 우리 6년 동안 동실이었잖아!”

  “나와 동실이라고?”

 

  왜인지 점점 눈물이 차오르는 것 같은 이사쿠의 눈망울을 보고 토메사부로는 가는 눈을 떴다. 거짓말일 것 같은데. 또 거짓말 같지가 않았다. 행동거지가 그랬다. 말투에 가시가 없고, 움직임에 날이 없었다. 고민하던 토메사부로는 경계를 슬슬 늦추었다. 이사쿠가 말하는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 방에선 살기도 적의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젠포우지, 그런데 그 상자엔.”

  “토메사부로, 그게...”

 

  갑작스럽게 이사쿠의 큐짱에 대한 자랑이 이어졌다. 상자 사이즈가 성인남성 체격에 맞게 제작되어 들고 다니기도 편하고, 붕대 수납은 기존의 것과 다르게 대량으로 가능하며, 연결부분이 튼튼하게 만들어져 위급할 때 빠르게 여닫을 수 있는... 구다구다구다. 급기야 이사쿠는 주변에 꽃을 날리며 상자를 안고 빙글빙글 춤을 췄다. 이사쿠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자기자랑을 좋아하는 누군가와 겹쳐 보였다. 토메사부로는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큐짱이 없으면 자기도 끝이라는 이사쿠의 말엔 의아하기까지 했다. 그저 상자에 의심할 만한 게 들었는지 물어보려던 거였는데 이런 반응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이게 그 정도로 좋은가? 오랫동안 잘 보관되긴 했지. 토메사부로는 반신반의 해하며 상자를 들여다봤다.

 

  “아! 아픈데 내가 너무 떠들었지? 붕대만 갈아주고 씻으려고 했는데.”

 

  이사쿠는 자연스럽게 토메사부로의 곁으로 와서 앉았다. 상자에서 새 붕대를 꺼내고 시커멓게 변한 붕대를 새것으로 갈아주었다. 우리가 진짜 동실인 건가. 아니면 꿈인가. 이사쿠의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진짜로 6년쯤 알고 지낸 사이 같이 느껴졌다. 토메사부로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이사쿠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팔과 머리에 붕대를 감아주는 손이 착각을 불러 오는 것 같았다. 동실자가 아니었다고 말하기도 미안할 다정함과 친밀함이었다. 보통 프로닌자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건가. 고민하던 토메사부로는 더 이상 의심하는 게 실례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사쿠가 흥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토메사부로는 이사쿠를 믿어보기로 했다. 보건위원회 1학년인 이나데라 란타로가 부르던 ‘붕대의 노래’였다. 불운하지만 친절한 위원회. 닌자와 가장 어울리지 않지만 닌자에게 꼭 필요한 위원회의 닌타마들이 줄곧 이 노래를 부르며 임무를 해냈다. 토메사부로는 밀려오는 약기운을 밀어내며 이사쿠에게 사과했다.

 

  “미안하다. 기억하지 못해서.”

 

  잠에 취해 뭉그러진 목소리였다. 이사쿠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너는 나를 알아본 사람이야. 네가 나를 창고에 데려갔잖아.”

 

  토메사부로가 맹한 상판으로 이사쿠를 올려다봤다. 졸려서 방금 이사쿠가 한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갔다. 이윽고 토메사부로는 앉아서 꾸벅꾸벅 졸았다. 붕대를 모두 감고 나선 얼떨결에 ‘고맙다. 이사쿠.’ 하고 인사했다. 아직 성을 부르지 않고 이름만 부르기엔 어색한 감이 있었지만 감사 인사를 할 땐 그렇게 부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

 

 

  이사쿠의 간호를 받은 지 4일째. 어째 토메사부로의 꼴이 더 만신창이가 됐다. 일주일이면 회복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갈수록 아침에 눈을 뜨기가 버거웠다. 오늘은 해가 중천이 되어 일어났다. 온몸이 무거웠다. 감기 때문이었다. 이사쿠가 말했다. 이건 불운이 옮은 거라고. 어제는 열이 펄펄 끓는 토메사부로의 손을 부여잡고 이사쿠가 몇 번이고 사과했다. 미안해애. 미안해 토메사부로오. 거기에 대고 토메사부로는 있는 힘을 쥐어짜 말했다. 신경 쓰지 마. 동실이잖냐.

 

  사실 엊그제 이사쿠와 같이 연못가에 약초를 따러 갔을 때부터 몸이 별로 좋지 않았다. 거기다 갑자기 쏟아진 비를 맞고 나니 몸이 맛탱이가 간 거다. 기숙사에 돌아온 뒤로 계속 몸이 달달 떨렸다.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니까 그러려니 했다.

 

  문제는 다음 날이었다.

 

  해가 뜨자마자 이사쿠와 토메사부로는 그 전날 두고 온 약초와 바구니를 찾기 위해 연못가로 향했다. 물이 불어서인지 쉽게 찾아지지는 않았다. 정오가 돼서야 이사쿠가 진흙 묻은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토메사부로! 찾았어!” 열심히 캔 약초가 그대로 잘 담겨있는 걸 보고 토메사부로의 얼굴까지 밝아졌다. 신이 난 이사쿠가 토메사부로를 부르며 달려갔다.

 

  “토메사부로! 다행이지! 오늘은 운이 좋아!”

 

  그렇게 말하는 순간, 이사쿠의 해맑은 얼굴을 담고 있던 카메라의 초점이 그의 발아래로 향한다. 비 때문에 무성해진 풀 사이로 줌인 되는 화면. 이윽고 이사쿠가 슬로 모션으로 움직였다. 돌에 걸린 발. 놀라서 벌어지는 입과 넘어질 것을 예상하고 점점 찡그려지는 눈. 품에서 떨어져 나간 바구니는 공중으로 붕 떴다. 이사쿠는 속으로 생각했다.

 

  ‘불운이다!’

 

  연못을 향해 날아가는 바구니를 보며 이사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물속에 빠지면 아마 저 약초는 포기해야 할 것이다. 워낙 수심이 깊은 곳이었다. 이사쿠가 반쯤 포기했을 때 저쪽에서 누군가 튀어 올랐다. 우거진 풀숲 사이에서 잽싸게 날아오른 건 당연히 토메사부로였다.

풍덩.

  바구니를 끌어안은 몸이 일순간에 연못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토메사부로!!”

 

  이사쿠가 다급하게 외치며 연못가로 달려갔다. 키보다 높게 자란 풀들을 걷어내자 물 밖으로 빠져나온 머리 하나가 보였다. 이사쿠는 놀란 가슴께를 쓸어내렸다. 헤엄쳐 다가오는 토메사부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 이사쿠. 이것부터 받아.”

  토메사부로가 바구니를 건넸다.

  “토메사부로, 왜 너는.”

  “우, 우액취!”

 

  홀딱 젖은 몸에서 나오는 재채기 소리가 우렁찼다. 결국 어제저녁 보건실은 토메사부로의 차지였다.

 

 

 

  그러니까 오늘은 좀 제대로 쉴 예정이었다. 이사쿠가 아득바득 토메사부로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보채서 용구위의 일까지 부탁해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밖에서 간헐적으로 신베의 비명이 들리니 더 자려고 해도 잘 수가 없다. 토메사부로는 미지근해진 지 오래인 물수건을 걷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고로 가기 위해 교실 주변을 지나고 있는데 1학년인 츠루마치 후시키조가 로반 친구들과 함께 수리검 연습을 하는 게 보였다.

 

  “그니까 인술학원에 귀신이 있다는 거지~ 스릴과 서스펜스~”

 

  귀신이라고?

 

  토메사부로가 가던 길을 멈추고 1학년들을 눈으로 좇았다. 귀신이라면 오늘 종일 들렸던 신베의 괴성과 관련이 있을지도 몰랐다. 가서 직접 물어보려다가 담장을 타고 올라갔다. 아직 수업 종이 치려면 멀었기 때문이었다. 실기 담당인 야마다 덴조 선생님의 눈을 피해 토메사부로는 몸을 납작하게 엎드렸다.

 

  엿들어본 바로는 용구위가 가는 곳마다 이상한 현상이 일어난다는 얘기 같았다. 사라진 무기를 찾아 한참 돌아다녔더니 창고에 있었다던가, 4학년 이반의 구멍파기소승인 아야베 키하치로가 파놓은 함정에 누군가 걸려서 보면 아무도 없다던가, 해무해무가 아무도 없는 곳을 향해서 으르렁거리며 경계했다는 기묘한 얘기들이 이어졌다. 토메사부로는 왠지 모르게 이사쿠가 생각났다.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함정이란 함정에 다 빠질만한 건 인술학원에 이사쿠뿐일 것 같았다. 걔가 입에 달고 사는 불운도 한몫했을 것이다. 토메사부로는 이사쿠가 구멍에 빠진 모습을 상상하며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나 다를까 보건실에서 니이노 선생님께 치료를 받고, 창고까지 둘러보고 오는 동안 이사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토메사부로는 아무나 붙잡고 이사쿠는 행방을 물었다. 그러나 번번이 ‘이사쿠가 뭐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닌타마들은 가만히 토메사부로의 다친 머리를 쳐다보거나 어깨를 으쓱였다. 6학년이라고요? 6학년에 그런 선배가 있었어요?

 

  토메사부로는 점점 불안해졌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이사쿠를 불러봐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아무래도 아야베가 가끔 공을 들여 파놓는 깊은 참호들이 마음에 걸렸다. 그런 구멍은 너무 깊어서 누군가 밧줄을 내려주지 않는 이상 올라오기도 어려웠다. 정신을 잃고 쓰러졌으면 어쩌나. 토메사부로는 눈을 부릅뜨고 아야베가 남긴 흔적을 찾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왜 아무도 이사쿠를 모르는지에 대해 간간이 의문이 들었으나 지금은 그가 무사한지 확인하는 것이 먼저였다. 슬슬 해가 져가고 있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이사쿠를 만나길 바랐다. 토메사부로는 활 연습장에서부터 쭉 이어진 잔디밭을 향해 달려갔다. 그 너머로는 화승총과 대포연습장이 보였다.

 

  “이사쿠! 젠포우지 이사쿠! 이사,”

 

 

  발바닥에 디뎌지는 것이 없어 다리가 아래로 쑥 빠졌다. 몸도 같이 기울었다. 미처 함정표시를 발견하지 못한 토메사부로는 함정 속으로 고꾸라졌다. 조금 더 밝았으면 깊이라도 가늠했을 텐데 땅에 부딪히고 나서야 슬슬 눈이 어둠에 적응했다. 참호가 키의 두 배는 되는 것 같았다. 토메사부로는 낙담했다. 발목이 시큰거렸다. 떨어질 때 잘못 떨어져서 삔 것 같았다. 옷 밑단을 조금 뜯어 발목에 감싼 후 쪼그려 앉았다. 어둠이 찾아오자 피로가 급격히 몰려왔다. 이사쿠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만이 간헐적으로 잠을 쫓아낼 뿐이었다. 아픈 상태에서 종일 뛰어다녔더니 으슬으슬 춥기까지 했다. 아침에 누군가 연습하러 오기라도 기다려야 하는 건가. 토메사부로는 다가오는 사람의 기척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눈을 감고 집중했다.

 

  “.......”

 

  역시 아무도 없다. 사람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도 지나가지 않았다. 토메사부로는 감기는 눈을 비비며 잘 준비를 했다. 추워서 괜찮을지 걱정됐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팔짱을 끼며 드러누우려는데 저 구석에 누군가 있는 게 보였다. 토메사부로는 얼른 몸을 일으켜 쿠나이를 빼 들었다. 적이라면 승부를 볼 생각이었다. 토메사부로가 절뚝거리며 다가가 누구냐고 물었다. 얼굴을 무릎에 묻고 있어서 보이지 않았지만 다가갈수록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이사쿠?”

  울어서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 이사쿠를 보고 토메사부로가 가까이 다가갔다. 이사쿠가 얼른 눈가를 부볐다.

  “진짜 이사쿠야?”

  “...토메사부로까지 오게 하다니.”

  이사쿠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사쿠 너 계속 여기에 있었어? 어디 다친 거야? 왜 구조요청도 하지도 않고...”

  대답이 없는 정수리에 대고 토메사부로가 계속해서 물었다. 살펴본 이사쿠는 이례 없이 상심한 모습이었다.

  “왜... 나갈 생각 없는 것처럼. 여기 있는 거냐고.”

  “......”

  “이사쿠.”

  “아무랑도 마주치고 싶지 않아.”

  “무슨 일인데. 용구위원들이 힘들게 했어?”

  “아니야. 내가... 용구위원들을 곤란하게 만들었어. 불운해서 그래. 너랑도 더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불운이 옮잖아.”

  “뭐어?”

  “.......”

  “진심이냐. 나랑 마주치고 싶지 않다고?”

  “.......”

 

  속상한 얼굴로 내려다보던 토메사부로가 이사쿠의 곁으로 가서 앉았다. 성질 같아선 버럭버럭 소리라도 지르고 내던져서 기숙사로 끌고 갔을 것 같은데 도저히 기력이 나질 않았다. 달 한 가운데로 커다란 구름이 지나갔다. 주변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둘 다 역력히 지친 기색이었다. 토메사부로는 이사쿠를 달래기 위해 잠시 속으로 말을 골랐다.

 

  “이사쿠,”

  “.......”

  “이제 와서 말하지만. 머리를 다쳐서 그런지 너랑 이전에 있던 기억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아. 그렇지만 너랑 함께 하는 내내 즐거웠어. 약초를 따러 가는 것도, 비를 맞으면서 기숙사에 돌아오는 것도. 같이 목욕하고 같은 시간에 잠을 자는 것도 그렇고. 내가 아프다고 하면 나서서 돌봐주던 것도 감사해하고 있어. 나는 동실이라는 이유만으로 네가, 그니까. 이런 말은 좀 부끄럽지만, 너를 귀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가끔 우리가 하는 일에 우연한 일들이 생겨서 다치기도 하고 아프기도 했지만, 너와의 만남 자체가 불운이라고 생각하진 않아. 그리고 내가 잊은 이전의 기억들도 분명 그랬을 거라고 믿고 있어.”

  “.......”

  “이런 말로는, 위로가 안 되겠지?”

  “아니야.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토메사부로.”

  “내가 이런 건 잘못해서 미안. 아, 그래도 오늘 용구위 맡아줘서 고맙다. 네 덕에 오늘 아야베의 함정을 평소보다 두 배나 메웠다는데. 키산타가 소문내고 다니더라.”

 

  토메사부로가 웃음기를 섞어가며 얘기했다. 돌아본 이사쿠의 표정이 아까보다 한결 나아 보였다. 별거 없는 칭찬에 상기 된 것 같기도 했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행운이 되고 싶고,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 잘 알아. 그렇지만 불운하다고 해서,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해서 네가 없어져야 할 이유가 되진 않아. 그건 너 스스로를 미워할 때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힘내서 같이 여기를 빠져나가자. 기숙사로 돌아가자, 이사쿠.”

  “왜 나한테 이렇게 대해주는 거야?”

 

  이사쿠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토메사부로는 거의 잠길 듯한 눈을 하고 이쪽을 돌아봤다.

 

  “그야,”

  “동실이라서? 동실이 아니라면?”

  “동실이 아니라고? 글쎄에. 그건...”

 

  토메사부로의 목소리에 점점 힘이 빠졌다. 이사쿠는 생각하다 말고 잠에 들어버린 토메사부로에게 어깨를 내주었다. 달이 어둡고 별빛이 밝은 밤이었다.

 

  “토메사부로, 우리가 백 년 전에 만났으면 어땠을까. 그때도 좋은 친구였을까. 그때도 너는 갖고 있으면 불운해지는 상자를 아껴줬을까.”

  “.......” 

  “토메사부로, 나도 네가 귀해. 너는 백 년이 지나 나를 알아 봐준 사람이니까.”

 

  이사쿠는 어쩐지 매번 토메사부로의 자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이사쿠는 다치지도, 지치지도, 자지도 않으니까 당연한 지도 몰랐다. 이사쿠는 이제야 토메사부로의 발목이 퉁퉁 부은 걸 알아챘다. 어지러운 마음에 마른세수를 했다. 편히 쉴 수 있도록 눕혀주자 그가 뒤척이며 미간을 좁혔다. 안 좋은 꿈이라도 꾸나 싶었다.

 

  구덩이 속으로 1학년처럼 몸이 작아진 토메사부로가 떨어진다. 얼굴이 몸뚱이만 하고 팔다리가 짤따랗다. 손발도 작다. 어째서 이런 몸이 된 거지? 의문을 갖는 동안 토메사부로는 함정 속으로 계속 빨려 들어갔다. 키의 열 배는 되는 높이에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착지할 땐 몸에 충격이 하나도 없었다. 토메사부로는 이게 환각이던가 꿈일 거라고 대충 어림짐작했다. 아래엔 작은 이사쿠도 있었다.

 

  “어이 이사쿠, 여기서 뭐 하는 거냐. 큐짱은 왜 또 여기에 있어?”

 

  생각해보면 큐짱은 항상 이사쿠 곁에 있었다. 어딘가를 갈 때도, 방으로 돌아올 때도. 토메사부로는 말끝마다 상자가 없으면 안 된다고 했던 이사쿠의 문장들을 떠올렸다. 석연치 않은 표정을 한 토메사부로가 앙증맞은 발로 이사쿠를 향해  다가갔다. 작은 이사쿠는 상자에서 꺼낸 붕대들을 연결하고 있었다. 얘도 손이 조그맸다.

 

  “이사쿠, 그걸로 뭐 하려고?”

  “여기서 빠져나가야지! 계속 여기 있다간 너 죽을 지도 모르니까!”

  “무슨 소리야. 나 완전 멀쩡해.”

  “전혀 안 멀쩡해!”

 

  작은 이사쿠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토메사부로는 조금 화가 나 보이는 이사쿠의 옆에 앉았다. 눈치를 보다가 함께 붕대를 묶었다. 붕대의 끝은 무게감이 있는 돌멩이들로 채우고, 사이사이엔 쿠나이와 수리검을 끼웠다. 돌이 함정 밖의 나뭇가지를 휘감고 쿠나이와 수리검이 지탱을 도와주면 한 명 정도는 어렵지 않게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작은 이사쿠는 단단하게 묶은 붕대를 줄표창 던지듯 휘둘렀다. 표정이 비장했다. 몇 번을 입구에 부딪치던 붕대가 드디어 밖으로 빠져나갔다. 바로 묶이지는 않았다. 몇 번이고 내던져야 한 번 걸릴까 말까 했다. 그나마도 약한 나뭇가지에 걸려 손쉽게 부러졌다. 성질이 뻗친 작은 토메사부로가 승부다! 외치며 붕대를 던지기를 반복했다. 수십 번을 돌리고 나자 나무 하나에 제대로 걸렸다. 붕대를 세게 당겨본 작은 이사쿠가 외쳤다.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토메사부로! 내가 올라가서 끌어 올려줄게!”

  “아니, 내가 올라가겠다. 이사쿠.” 

  “너 발목을 삐었잖아. 여기서 기다려!”

 

  그러고 보니 발목을 다쳤던 것 같기도. 토메사부로는 알 수 없는 괴리감을 느꼈지만 붕대를 타고 올라가는 이사쿠에게 집중 하느라 전부 까먹었다. 이사쿠가 벽을 오르는 동안 토메사부로는 이사쿠가 떨어질 것을 대비했다. 완전히 땅 위로 올라가는 엉덩이를 보고 나서야 토메사부로는 안심했다.

 

  “토메사부로 이제 붕대를 잡고 올라와!”

 

  작은 이사쿠가 위에서 소리쳤다. 동시에 땅이 흔들리고 어디선가 이질적인 음성이 들렸다.

 

  [그런데 란타로, 어떻게 케마를 찾았니?]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이게 어디서 나는 소리지? 올려다보던 하늘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조각조각 유리처럼 깨지더니 파편이 우수수 쏟아졌다.

 

  [붕대가 길을 알려줬어요.]

 

  이사쿠는 어디 있지? 작은 토메사부로가 서둘러 이사쿠를 찾아 헤맸다. 위에 있던 작은 이사쿠가 점점 녹고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이 커다래졌다.

 

  [붕대가 길을 알려줬다고?]

 

  “토메사부로!”

  “이사쿠!”

 

  세상이 시커멓게 변했다. 그리고 이내 밝은 빛이 쏟아졌다.

 

  [네. 붕대가 여기저기 떨어져 있어서...

 주으러 가다 보니까 구멍 속에 케마 선배가...”

 

  눈을 뜨자 꿈에서 들리던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게 보였다. 보건위 란타로와 니이노 선생님이었다.

 

  “아! 케마 선배가 눈을 떴다! 어떻게 된 거예요? 케마 선배! 이틀 내내 누워있었다고요!”

  “이사쿠는?”

 

  토메사부로의 물음에 란타로의 옆에 있던 셋츠노 키리마루가 고개를 갸우뚱 세웠다.

 

  “이사쿠가 누구예요? 자는 내내 부르던데요.”

 

  토메사부로는 설마, 하고 뛰쳐나갔다. 날이 흐렸다. 또 비가 올 것 같았다. 지겹도록 오래가는 장마였다. 이사쿠와 함께하는 동안 맑은 날이 한 번도 없었다. 토메사부로는 이것마저 이사쿠가 자신의 불운으로 여길까 봐 걱정스러웠다. 복도를 따라 걷다 보니 마루에 걸터앉은 이사쿠가 보였다.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이사쿠가 토메사부로를 보자 벌떡 일어났다.

 

  “토메사부로! 몸은 괜찮아?”

  “어? 응.”

  “왜 더 안 쉬고 나왔어?”

  “저기, 이사쿠. 혹시...”

 

  토메사부로는 불안한 표정으로 이사쿠를 바라봤다. 눈을 마주하는 이사쿠의 얼굴에 생각이 많아 보였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붕대가 길을 알려줬다는 란타로의 말이 떠올랐다. 토메사부로는 모든 사실을 어렴풋하게 알 것 같으면서도, 이사쿠가 직접 말해주지 않는 이상 굳이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솔직히는 진실을 직면하고 싶지 않아 생각을 미뤘다.

 

  “아니야. 밥은 먹었어?”

  “아직. 토메사부로도 아직 밥 못 먹었지? 아마 식당 아주머니가 특제 죽 해다 주실 거야.”

  “응. 그래.”

  “그럼 나 먼저 밥 먹고 올게. 방에서 봐.”

 

  이사쿠는 끝내 케마의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이 착잡했다. 기숙사에 돌아온 이후로 케마가 이틀이나 일어나지 않았다. 감기 때 보다 더 심하게 앓는 그를 보면서 많은 감정이 휘몰아쳤다.

 

  원래 큐짱은 장인이 만든 상자였다. 그러나 팔리기도 전에 상점이 전쟁으로 인해 무너졌다. 운 좋게 부서지지 않은 상자만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전장의가 주워다 사용한 적도 있지만 얼마 가지 않았다. 피칠갑이 되어 절간에서 쉬던 전장의는 금방 세상을 떠났다. 상자는 그 자리에 버려졌다. 절에 있는 스님이나 누군가가 발견해주기를 바랐지만 절도 전쟁을 피할 수는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절이 있던 곳에 인술학원이 설립되었다. 공사 중에도, 그 이후에도 아무도 상자를 발견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켜켜이 쌓인 한은 원혼으로 변했다. 그리고 수십 년이 흘러 귀신이 붙은 상자와 케마 토메사부로가 만난다. 상자가 만들어진지 99년째의 일이었다.

 

  그날 창고에 혼자 있던 토메사부로를 불러보지 말걸. 창고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요괴나 될걸. 케마를 만나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자신의 생을 이렇게 뒤바꿀 줄 몰랐다. 그저 토메사부로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요괴가 되더라도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모든 게 허황된 꿈이란 걸 토메사부로의 모습이 반증한다. 이대로 하룻밤만 지나면 기다리던 100년이 된다. 그때는 더 큰 불운이 이사쿠를 삼킬 것이다. 불운을 넘어 재앙을 가져다 주는 진짜 요괴가 되는 것이다.

 

  “나는 상자에 붙은 귀신. 너는 살아있는 사람.”

 

  이상과 현실의 커다란 간극이 이사쿠를 옥죄여 왔다. 토메사부로, 왜 쓸데없이 나에게 귀하다는 말해줬어. 왜 여기에 있어도 된다는 희망을 줬어. 이사쿠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란타로와 키리마루가 하던 대화를 떠올렸다.

 

  ‘요즘 케마 선배 정말 이상하지.’

  ‘응. 산지로가 귀신 들린 것 같다고 하더라.’ 

  ‘에이. 아프니까 그런 거겠지.

  ‘그런가. 그런 것 치고 요즘 안 좋은 일이 겹치는 거 같지 않아? 보건위원회인 너보다 더 불운해 보인다고.’

 

  토메사부로에게 방으로 간다고 말했는데. 한참을 방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뇌민하는 사이 어느새 밤이 되었다.

 

 

 

 

 

‘만나고 싶었어의 단’ 하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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