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직 카펫 라이드
칸자키 사몬 & 토마츠 사쿠베 & 츠기야 산노스케
르멩 (@LEUMENG)
사몬과 산노스케는 눈앞에 펼쳐진 상인의 물건들을 쳐다보다가, 서로를 잠시 쳐다보다가, 다시 전시된 상품들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두툼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갈색 원단 위로 온갖 처음 보는 소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흔들면 안에서 눈이 내리는 유리 구슬, 짤랑거리는 작은 종, 하얀 털이 달린 붉은 솜옷, 나뭇잎과 반짝이는 구슬들로 꾸며진 원형 벽걸이 장식, 사람과 사슴과 썰매의 나무조각, 별이 달린 작은 침엽수와 알록달록한 버선까지. 분명 먹과 종이를 사러 나온 거긴 했지만 연말을 맞아 떠들썩한 시장통에 구석진 골목까지 떠밀려온 게 자신들의 잘못은 아닐 터였다. 게다가 남만에서 온 처음 보는 진귀한 물건들이 이렇게나 잔뜩인데 어떻게 그냥 등 돌리고 떠나겠는가. 사쿠베도 길을 잃어버렸을 때는 차라리 제발 어디 가지 말고 얌전히 그 자리에 있으라고 했었다. 사몬과 산노스케는 저들끼리 그렇게 속삭이며 합리화하고는 계속 구경해도 괜찮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쿠베가 들었더라면 그냥 너희가 신나서 날뛰느라 밧줄까지 풀어먹은 거 아니냐며 분노를 참지 못했겠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금은 둘뿐이었다.
"이 사슴은 왜 코가 빨개요?"
"그건 그냥 사슴이 아니라 루돌프란다."
"루돌프요?"
상인은 호탕하게 웃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남만에서는 내일이 바로 크리스마스라는 명절인데, 별이 탄생한 날이라 하여 성탄절이라고도 부르고, 그 날 밤에는 산타가 착한 아이들에게 몰래 선물을 주며, 그 산타의 썰매를 끄는 게 빛나는 코를 가진 사슴 루돌프라는, 그런 동화 같은 이야기였다. 사몬과 산노스케는 놀란 눈빛을 주고받았다. 아무도 몰래 실내까지 들어와 머리맡에 선물을 놓아두고 간다니, 그것도 하루만에 온 세상의 아이들에게! 웬만한 프로 닌자도 혀를 내두를 법한 실력이 아닌가 싶어 입을 떡 벌리자 상인은 그들이 여느 아이들처럼 선물에 흥미를 느꼈다 착각하고 열띤 설교를 이어나갔다. 그러니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친구들이랑도 친하게 지내고, 떼쓰거나 울지도 말고…. 구구절절 평화롭고 형식적인 교훈이 인술학원에 다니는 학생들의 귀에 들어올 리는 없었으나 계속 듣다 보니 착한 아이가 선물을 받는다는 단순한 인과관계 하나만큼은 제법 마음에 드는 것도 같았다.
"사쿠베는 선물 받겠지?"
"사쿠베는 받아야지."
그들이 '착한 아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당연하게 떠올린 건, 교실이며 방이며 온종일 자신들을 챙겨주는데다 위원회에서도 성실하게 선후배를 고루 돌보는 사쿠베였다. 그렇게까지 열심히 사는데 연말에 선물 하나쯤 받지 못한다면 억울하지 않겠는가. 물론 이 역시도 본인이 들었다면 그걸 아는 자식들이 그렇게 싸돌아다니냐며 뒷목을 잡았을 생각이지만 아무튼, 정말 산타가 있다면 사쿠베에게 선물을 안 줄 리가 없다.
"…여기 받고 싶은 선물을 적어서 넣어두면 된다고요?"
둘이 남만식 버선을 살피며 고민하는 듯한 기색을 보이자 상인은 현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솜씨를 뽐내기 시작했다. 이게 바다를 건너온 원단으로 만든 양말이며 보온도 잘 돼서 성탄절이 지난 후에도 계속 신을 수 있고 어쩌고저쩌고. 조금 바가지를 쓰는 기분이었지만 모처럼 간접적으로나마 사쿠베에게 선물을 줄 생각에 기분이 좋으니 속아주기로 했다. 돈을 건네고, 사쿠베의 머리칼을 닮은 빨간색 양말을 받자마자 골목 입구 쪽에서 자신들을 부르는 사쿠베의 목소리가 얼핏 들렸다. 꾸벅 인사를 하고 골목 밖을 향해 달려나가면 아니나다를까 추위에 코끝이 얼어붙은 채로 울상이 된 사쿠베가 있다. 화를 낼 법도 한데 여전히 어디 있었냐며 걱정부터 하는 걸 보면 역시 사쿠베는 세상에서 제일 착한 애인 것 같다고, 산노스케는 품에 감춘 양말을 옷 위로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그날 밤은 눈송이가 달빛을 받아 별처럼 허공에서 빛났다. 성탄절이라는 이름과 쏙 어울리는 눈부신 전야였다. 그러나 내일이 그런 날이라는 걸 까맣게 모르는 사쿠베에게는 그저 으슬으슬 유난히 추운 날일 뿐이었다. 가뜩이나 하루종일 돌아다니는 바람에 피곤해 죽겠는데 묘하게 쭈뼛대는 동실들을 보고 어쩐지 두 배는 더 기운이 빠지는 것 같았다. 씻으러 다녀온 사이 저들끼리 쑥덕거리기에 뭘 하냐고 물어봤더니 말을 돌리질 않나, 어색하게 삐걱삐걱 이불을 뒤집어쓰고 먼저 자야겠다고 되도않는 연기를 하질 않나. 꿍꿍이가 있는 게 확실한데 아무리 잡고 흔들어도 입을 열지 않으니 불안해서 잠이 안 올 지경이었다. 결국 체력이 바닥나 될 대로 되라는 체념으로 자리에 누운 사쿠베는 벽 한 켠에 걸린 붉은 버선을 발견했다.
"…저게 뭐야…?"
어둠 속에서 시뻘겋게 존재감을 뽐내는 게 퍽 불길해서, 사쿠베는 저도 모르게 손에 쥔 미아 방지용 밧줄을 더 꼭 고쳐잡았다. 자세히 보니 익숙한 모양새도 아니고 기이하게 생겼다. 손바닥에 하도 힘을 주느라 굳은살이 눌려 쓸린다.
"저런 건 또 어디서 가져왔어?"
말을 걸어도 묵묵부답이다. 양옆으로 등을 돌리고 누워서 꼼짝을 않기에 아예 일어나 직접 확인하려 하자 사몬과 산노스케는 다급하게 사쿠베의 다리를 잡고 늘어졌다. 뭐가 있긴 있구나 싶어서 뿌리치고 팔을 휘둘러봐도 쓸데없이 힘만 좋아서들 떨어질 기미가 안 보인다. 뭔진 몰라도 자신에게 들키면 혼날 걸 알아서 숨기려고 하는 것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쳐 신경질이 난 사쿠베는 와락 소리를 질렀다.
"야! 안 놔? 저거 뭔데!"
"아, 별 거 아니야!"
"너네 제발 좀 가만히 좀 있으면 안될까? 어?"
"아니 근데 저건 진짜 별 거 아니야!"
"그래! 너 우리 못 믿어?"
"믿게 생겼어? 믿게 생겼냐고!"
오늘만 해도 갑자기 사라져서 얼마나 고생을 한 줄 아냐며 손가락질을 하는 사쿠베와 실랑이하느라 밤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가만히 있길래 이제 잠든 건가 싶어 살짝 놓으면 바로 벌떡 일어나 양말 쪽으로 기어가고, 질질 끌어와 이불을 세 겹이나 덮어주면 이불 아래서 발로 걷어차버리고. 간지럼을 태우고, 깔깔거리고, 베개싸움을 하고. 그렇지 않아도 늦게 돌아왔던 터라 평소 잠드는 때보다 늦은 시각이었는데 진심 반 장난 반으로 투닥거리다 보니 금세 자정이었다. 오늘과 내일의 경계를 알리는 쇠종이 학원 전체를 울리던 바로 그때였다. 사쿠베가 별안간 공중에 둥실 떠오른 건 말이다.
"…어?"
"어?"
"어…?"
너무 당황해서 뭐라 말이 나오지도 않았다. 저도 모르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불을 붙잡았으나 이불도 함께 딸려올 뿐이었다. 창호문이 덜컥 열리고, 아직 꿈인지 생시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어벙벙하게 바라만 보던 사몬과 산노스케도 함께 두둥실 부유하기 시작했다. 열린 문 밖으로 셋은 팔다리를 허우적대며 빠져나가, 이불에 매달린 채로 높이, 더 높이, 날았다. 땅이 점점 멀어지고 건물은 작아졌다. 겁에 질려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던 잠시 동안이 억겁처럼 길었다. 턱이 덜덜 떨릴 즈음에 펑 소리와 함께 그들의 몸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사쿠베는 그제야 눈을 깜빡였다. 아프지는 않았는데, 연기가 걷히고 나니 외형이 변해 있었다. 사이사이 파고드는 찬바람을 막지 못했던 얇은 잠옷은 두껍고 붉은 솜옷으로, 이불은 단단한 썰매로, 미아 방지용 밧줄은 몸줄로, 그리고 제 동실들은… 웬… 코가 빨갛게 빛나는 사슴으로……. 하도 어이가 없으니 이젠 정말 꿈을 꾸는구나 싶어 오히려 놀랍도록 차분한 기분이 든다. 그 와중에 스스로의 모습을 눈치챈 사몬과 산노스케는 신이 나서는 오두방정을 떨고 있었다.
"와, 와…, 와 이거 진짜 되네?"
"야 난 솔직히 그거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어."
아주 그냥 죽이 척척 맞는다. 사쿠베는 심호흡을 하고, 몸에 힘을 빼고, 썰매에 편하게 앉아, 양손으로 사몬과 산노스케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시장에서 길을 잃어 남만 상인을 만난 둘은 갖고 싶은 선물을 적어 넣으면 그대로 산타가 가져다준다는 말도 안 되는 양말을 사왔고, 생각해보니 사쿠베가 무슨 선물을 받고 싶어하는지 모른다는 걸 깨달아 고민하다가, 산타가 되면 그 모든 선물을 다 가질 수 있지 않겠느냐는 논리적이면서도 기상천외한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정말 '산타 사쿠베'라고 적어 그 쪽지를 양말 안에 넣었다. 그 결과가… 이거였다. 사쿠베는 자신들이 본 조각상과 똑같이 생겼다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친구들을 한 대씩 치고 싶은 충동을 애써 누르고, 일단은 고삐를 집어들었다. 땅에서도 그 난리였는데 하늘에서 미아가 되면 대체 어떻게 될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너네… 짐승 취급해서 미안하긴 한데 인과응보니까 얌전히 있어라."
고삐를 몸줄에다 엮자 둘은 익숙하게 허리를 맡겼다. 어차피 사슴이든 사람이든 평소에도 사쿠베에게 묶인 채로 끌려다녔던지라 특별히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외려 안정감이 드는지 평온한 표정으로 푸르릉 소리를 내기까지 한다. 사쿠베는 그 모습을 몇 초 동안 가만 쳐다보다가 마른세수를 했다. 갑자기 하늘로 떠오르고, 갑자기 뭐 산타인지 뭔지가 되고, 쟤들은 동물이 되고, 여러모로 비현실적이고 말도 안 되고 겁에 질려야 맞는 것 같은데, 눈앞에 비친 광경이 지나치게 낯익은 꼴이었다. 위화감이 하나도 없다. 얘네 분명 사람인데… 그냥 원래부터 이랬던 것 같다. 차라리 자신이 사슴이 됐다면 이렇게까지 혼란스럽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뇌리를 짜릿하게 스치고 지나간다. 사쿠베는 그쯤부터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확실하다고 결론을 지어버리기로 했다. 비록 두꺼운 옷 아래로 스멀스멀 차는 땀과 얼굴에 와닿는 칼바람이 생생한데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한 높이가 심장을 잡고 흔들어주기까지 하지만 말이다.
"…근데 뭐… 이제 어떡해?"
잠시 해탈했다가 돌아와서 황망하게 의문하자 사슴들은 코를 빛내며 허공에다 발굽질을 했다. 그러더니 당연하다는 듯 한목소리로 외쳤다.
"사쿠베, 선물!"
"선물 풀어봐!"
아, 맞다. 선물. 이 모든 난리통의 시작은 그거였다. 한 해 동안 너무나도 열심히 살았던 사쿠베에게 이런 식으로나마 한가득 선물을 안겨주고 싶었던 친구들의 마음. 그렇게 생각하니 치밀었던 짜증이 살짝 누그러지면서 입술이 씰룩거린다. 짜식들, 그냥 사고 안 치는 게 도와주는 건데 뭘 이런 걸 다. 아닌 척 하면서 광대는 이미 슬슬 올라가고 있었다. 사쿠베는 장갑에 묻힌 검지손가락으로 코 밑을 쓱 훔쳤다. 하긴, 덩치 차이도 안 나는 또래들 뒤치닥거리 하기가 어지간히 환멸이 나서 때려치고 싶다가도 결국 다시 어울려 다니는 게 다 이런 기분 때문이지 않았나. 어찌됐든 참 애들은 착하다고 생각하면서 뒤를 돌아본다. 뭐가 있을까. 새 옷? 새 무기? 애들 선물이니까 아무래도 무기는 아니려나? 그럼 신발? 필기구? 온 세상을 돌아다닌다는데 웬만한 건 다 있겠지? 간만에 설레서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러나 갖가지 상상과 기대에 부풀어 썰매의 짐칸을 살핀 직후 사쿠베는, 기뻐 소리를 지르지도 감동하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 말 없이 그대로 굳을 뿐이었다.
"왜 그래, 사쿠베?"
"뭐 이상한 거 있어?"
예상했던 것과 달리 사쿠베의 반응이 고요하자 사몬과 산노스케는 몸을 틀어 썰매 뒤쪽으로 향하려 했지만, 사쿠베가 대답 대신 갑작스레 확 고삐를 끌어당기는 바람에 멈추고 말았다. 영문을 몰라 눈과 코만 깜빡이는데,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부들부들 떨던 사쿠베가 대뜸 역정을 냈다.
"야 이…! 이…!"
"왜, 왜?"
사쿠베는 한 손으로는 고삐를 마저 잡고 다른 손으로는 뒤를 가리켰다. 그 방향을 따라 시선을 훑어보니 손끝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썰매 바닥만 덩그러니 눈을 받아내고 있었다. 분명 저기 선물이 있어야 하는데. 나무 조각상에서도 그랬는데. 어찌 된 까닭인지는 모르겠지만 '산타 사쿠베'에 선물까지 포함되진 않는 모양이었고, 사쿠베는 아닌 달밤에 농락당한 기분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산노스케가 당혹감에 변명거리를 필사적으로 생각해내는데 사몬이 옆에서 아, 하고 탄성을 뱉는다.
"선물을 아직 안 실었나 보네!"
"아, 그런가?"
"뭐?"
"가지러 가자!"
…가자고? 가지러 가자고? 사쿠베는 본능적으로 고삐를 틀어쥐었다. 세 사람 사이에 수북하게 쌓아둔 금지어 중 가장 빈번하게 사쿠베를 괴롭혔던 말이 바로 '가자'였다. 야, 잠깐. 제지하려 했으나 더듬더듬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모든 게 느리게 보인다. 사몬은 고개를 돌려 앞을 향하고,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듯 무릎을 굽히고, 자신은 피가 차게 식는다.
"아니… 어딜 가으아아아아악!"
사몬이 발을 구른다. 사쿠베와 산노스케의 몸이 뒤로 쏠린다. 공중에 덩그러니 떠있던 썰매가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하고 한겨울 얼음장 같은 공기가 얼굴을 그대로 맞닥뜨린다. 사쿠베는 고삐가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장갑 속 손이 하얘질 때까지 힘을 주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비명마저 잃었다. 하늘을… 달릴 수 있는 거였나. 얘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 산노스케는 왜 또 덩달아 뛰고 있으며 이 자식들은 왜 이렇게 빠른 걸까. 헛웃음이 터지는 족족 입김이 되어 하얗게 서린다. 땅에 발이라도 붙이고 있었다면 끌어당겨서 일단 멈췄을 텐데 어디 의지할 곳이 없으니 힘이 역부족이었다. 이 와중에 이쪽이니 저쪽이니 실랑이를 하느라 방향이 분산되어 조금 속도가 줄어든 게 우습고 슬프면서도 다행이었다.
"선물은 어디냐!"
"어디지?"
"얘들아 제발……."
꿈이다. 꿈이어야만 한다.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눈물이 찔끔 나왔다.
그렇게 생각을 포기한 채로 얼마나 달렸을까, 이끌리는 대로 고개를 이리저리 젖히던 사쿠베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요동치는 시야를 보면 정신을 잃을 것 같아서 눈을 꾹 감고 애써 현실을 부정하던 중이었다. 그새 썰매는 다그닥다그닥 산책하는 정도로 잔잔해져 있었고, 슬며시 눈꺼풀을 들어올려보면 보름달이 눈앞에 환하게 떠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처럼 가까운 별들과, 소복소복 옷자락에 내려앉는 함박눈과, 새까만 밤. 숨을 쉴 때마다 시린 코끝, 나지막한 감탄사에 엉겨붙는 서리, 빨간 불빛을 반짝이며 자신을 쳐다보는 두 쌍의 눈동자까지. 달무리를 드리웠다 사라지는 구름을 지켜보며 무의식 중에 감상을 속삭인다. 예쁘다. 순간 추위마저 안락하게 느껴졌다.
"여기가 어디야, 사쿠베?"
"길은 늬들이 잃어놓고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하냐?"
사몬의 당당한 질문에 반사적으로 대답하면서도 이상하게 화가 나지는 않는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런가, 아니면 엄두도 못 내봤던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겨울밤이 지금껏 봤던 무엇보다도 더 아름다워서 그런가. 설경이 나무와 산을 덮고 마을로까지 이어져 성탄절이라는 글자 그대로, 저 멀리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별의 탄생을 축복하는 듯했다.
"길 잃어버린 건 아니지. 너랑 있잖아."
"맞아."
"내가 뭐 나침반인 줄 알아?"
사쿠베는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선물 없는 성탄절이든 기운 다 빠진 산타든 방향치 순록들이든 아무래도 좋았다. 그냥 바람도 좋고 눈도 좋고 내일이 되어도 녹지 않을 기억이 좋았다. 썰매가 다시 끌리기 시작한다. 기분 좋게 머리칼이 살랑거린다. 모두 잠든 안온한 밤에 목적지 없이 하늘을 미끄러지는 시간. 이런 것도 그래, 선물이라 치지 뭐. 기왕 이렇게 된 거 사쿠베는 너무 깊이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하품도 참지 않았다. 학원에는 어떻게 돌아가지, 무심코 혼잣말을 하느라 다시 눈을 감으면, 그대로 새벽이었다.
이부자리에서 부스럭대며 일어난 사쿠베는 습관처럼 양옆을 두리번거렸다. 평소처럼 희한한 잠버릇으로 널브러진 동실들에게서 묘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머리를 두어 번 긁적이다가 어깨를 흔들어 깨운다. 일상적인 잠투정이 오간다. 잠이 덜 깬 채로 우물가로 나가면서 사쿠베는, 벽 한 켠에 얼핏 붉은 버선이 걸려있는 걸 봤다. 의아한 마음에 다시 문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어 확인해보면 벽은 아무런 장식 없이 휑하다. 잘못 봤나, 엄청 신나는 꿈을 꿨던 것 같은데. 갸웃대며 나선 베갯잇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묻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