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밤중의 선물
6학년
이청연 (@Iridescent_nin)
한밤중의 선물
란타로, 키리마루, 신베가 인술학원에서 맞이하는 첫 눈을 한창 즐기고 있을 때, 6학년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무언가를 바쁘게 준비하고 있었다.
그 전말은, 몇 주 전 키리마루가 도서실에서 한창 책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어느 책에서부터였다.
" 에-엥? 이게 뭐야. "
여느 날과 같이 지루한 수업시간이 끝나고, 란타로와 키리마루와 신베는 교실 문을 열고 뛰쳐나가고 있었다. 물론 위원회 일 때문에 놀 수는 없었지만 가는 길은 거의 비슷했으니까. 신베는 먼저 창고 쪽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조금 있다가 보자-!
그렇게 소리치고서 뒤돌려는데, 뒤에서 흙이 푹 꺼지는... 그러니까, 다름 아닌 함정이 발동되는 소리가 들렸다.
하아, 왠지 이럴 것 같더라... 괜찮아!?
엉덩이가 좀 아프긴 한데 괜찮아!
그게 괜찮은 건가… 때마침 용구위원회로 뛰어가던 3학년 로반의 토마츠 사쿠베 선배가 다가왔다. 방금 란타로가 함정에 빠졌다고 말하자 선배는 금방 줄사다리를 가져오겠다고 하셨고, 란타로는 다행히도 함정에서 무사히 빠져나왔다. 이럴 때마다 자꾸 함정파기 소승 아야베 키하치로 선배가 생각나서 짜증이 났다. 란타로가 이런 일 때문에 한두 번 다치는 것도 아니고, 하급생들을 전혀 신경쓰질 않는다는 게 기분이 나빴다.
줄사다리를 기다리는 동안,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지체되는 바람에 늦을 것 같았다. 란타로를 구출하고 나서야 일어선 키리마루는 정신없이 뛰어서 도서실에 도착했다.
도서실의 분위기는 꽤나 가라앉아 있었다. 연유는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키리마루가 도착한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위원장이 손에 줄표창을 든 채로 도서실 문을 열었으니까. 아니, 그것보다도 책장 하나가 통째로 넘어져서 책더미가 쌓이고 찢긴 종이가 날리는 이 광경을 보면 뻔했다. 6학년 로반의 나나마츠 코헤이타 선배가 또 화려하게 다녀가신 게 틀림없다.
키리마루는 언제나 곤란한 듯 웃을 뿐이었지만, 속으로는 내심 귀찮아 하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습관으로 가지고 있었던 부지런함이, 자꾸 할 일을 늘리는 나나마츠 선배를 달갑지 않게 여기도록 만든 것이다. 아무리 유쾌하고 단순하고 힘이 세다지만...
하필 쓰러뜨린 책장도 도서실의 제일 안쪽 가장자리에 위치한,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거나 유익하지 않아서 걸러진 책이 모인 것이었다. 즉 내용의 질이 낮은 책들을 모아 놓은 것이었는데, 대출되는 것도 거의 없고 항상 구석에 있어서 순서대로 다시 정리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게다가 종이는 케케묵은 냄새가 풍겼고. 벌써부터 손에 저 냄새가 밸 생각을 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어쩌겠어. 위원장이 나나마츠 선배를 쫓는 동안, 먼저 와 있었던 후와 라이조 선배가 하치야 사부로 선배를 불러서 부서진 책장을 함께 밖으로 빼내고 있었다. 키리마루는 책더미에서 종이가 찢기지 않도록 조심히 하나씩 빼내서 정리하기 시작했다.
모래먼지를 마구 일으키며 쫓고 쫓기는 선배들의 모습을 목격하고, 거의 휩쓸릴 뻔해서 늦게 온 1학년 로반의 니노츠보 아야카시마루도 곧이어 도서실에 도착했다.
역시······. 나나마츠 선배가 다녀가셨구나.
다들 이쯤 되니 대충 예상하고 오는 눈치였다. 하긴 방음이 잘 된 도서실 안에서도 나나마츠 선배의 고함이 생생히 들리는데 누가 모를까. 아야카시마루도 내 옆에 쪼그려 앉아 합류했다. 위원장은 새 책장을 부탁하기 위해 용구위원회를 불러서 아예 케마 토메사부로 선배를 데려온 참이었다. 아무래도 나나마츠 선배가 책장을 통째로 부순 일은 흔하지 않아서, 이번에 조금 많이 화나신 것 같았다. 케마 토메사부로 선배가 짜증을 잔뜩 내시면서도 책장을 금방 만들어 주셔서 위원장도 곧 책 분류에 동참했다.
책더미를 차례차례 정리해나가면서, 키리마루가 느낀 건 신기함이었다. 일단 제목부터 무언가 심상치 않은 오오라가 풍기는 것들이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복잡한 한자라던가, 혀 꼬이는 발음으로 이루어진 오묘한 발음의 히라가나라던가. 왜 저 구석탱이에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키리마루는 발음하기 어려워 보이는 제목들을 몇 개 골라서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는데, 가끔씩 후와 선배나 나카자이케 선배가 단어를 알아차리고 무슨 뜻인지 알려주시기도 했다.
" 쿠, 쿠리.. 스마... 스? "
" 아, 그건 크리스마스라는 거야. "
" 발음 한 번 특이하네요. 무슨 뜻이에요? "
" 서양의 명절인데, 나무를 베어서 그걸 꾸미고 양말을 걸어두면 그날 밤에 누군가 찾아와서 양말 안에 선물을 두고 간대. "
" 오... 언제인지 아세요, 선배? "
" 아마 이 주일 정도 있으면 크리스마스인 것 같아! "
" 우리도 선물 받는 날 하나만 있으면 좋겠네요~ "
" 키리마루... 돈으로 받을 생각이야? "
별 관심은 없었다. 자국의 명절도 제대로 챙기기 어려운 형편에 타국의 명절, 그것도 저 멀리 이름도 모르는 나라의 명절을 챙길 형편은 더더욱 없었다. 키리마루는 내심 선물을 하나쯤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이면 돈으로.
...
쵸지는 후배들을 먼저 내보낸 후, 도서실에 남아있었다. 벌써 밖이 어둑했지만 촛불을 하나 남겨둔 덕에 약하게나마 빛이 있었고, 쵸지는 그 빛에 의존해서 도서실 안을 걸어갔다. 책으로 둘러싸여 있어서인지 빛은 마치 깨진 유리파편 같은 모양을 띠었다.
도서실 벽을 따라 쭉 걷자, 방금 새로 들어온 책장의 나무 냄새가 훅 끼쳤다. 묵은 종이 냄새가 조금 덜한 것 같았다. 쵸지는 책을 가만히 살펴보다가 중간쯤에 꽂혀 있는 책을 집어들었다. 방 안에 약한 빛이 넘실거렸다. 오른손으로 책을 집어 제목을 확인하자, `크리스마스` 라고 적혀 있었다.
쵸지는 그 책을 품 안에 집어넣고 도서실을 나왔다.
...
" 자, 그럼 계획을 짜보자. 일단 교장선생님께 말씀을 드리고 해야 되는데... "
" 아, 오늘 아침에 내가 허락 받아 놨어. "
" 예산은 우리 든든한 회계위원 시오에 몬지로한테 맡기면 돼. "
" 뭐?? "
" 으음- 선물은 뭘 준비해야 하지...? "
쵸지가 생각해낸 이벤트는 어느새 6학년 전체가 몰두하고 있었다. 취지는 1학년들에게 선물을 주기 위한 것. 선물은 무엇을 줘야 할지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아는 대로 좋아할 만한 것을 주기로 했다. 열아홉 명이나 되는 탓에 실습에 시달리면서도 하루에 몇 번이고 모여서 머리를 맞댄 6학년들은 아이들을 관찰했고, 이따금 미행하기도 했다. 키산타나 키리마루, 헤이다유처럼 좋아하는 것이 확고한 아이들은 정하기가 비교적 쉬운 편이었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으니까.
5일쯤 지났을까, 드디어 모두한테 줄 선물의 목록이 완성되었다. 다들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 때문에 명단에 그만큼 깊은 의미가 있었다. 조금 쉬기도 전에 기한은 일주일로 바짝 다가왔다.
" 지금부터 중요해... 선물은 정성이라고 하잖아. "
" 좀만, 쉬면, 안 되냐..!!! "
" 제일 할 일이 많은 용구위원회 위원장이 쉬겠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몬지로, 너도 예산 좀 잘 해봐. "
" 밤을 새는 게 쉬운 일인 줄 아냐... "
" 사소한 건 신경쓰지 마-!! "
이들이 다음으로 한 일은, 선물을 만드는 일. 정성이 담겨야 한다는 것 때문에 결국 기본적인 재료를 제외하고는 전부 수작업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선물인 만큼 간단한 무늬나 고리를 추가하는 것은 의외로 손재주가 뛰어난 코헤이타가 도맡기로 했다. 필요하다면 토메사부로의 도움을 받고.
6학년은 교장선생님이 눈감아주시는 범위 내에서 마을을 들락거리고 산을 넘어서 이것저것 필요한 것을 찾았다. 특히나 고생한 건 토메사부로였는데, 작은 선물이긴 하지만 대부분 나무를 손질하는 작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용구위원들 몰래 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일할 수 있는 시간도 그닥 많지 않았고..
" 트리는 적당히 숲에서 반듯한 소나무를 잘라오면 돼. 문제는 양말이지... "
" 그러게. 양말은 어떡해야 하지? "
" 선생님들한테 부탁드릴까? "
" 그거 좋다. "
그렇게 후배들을 제외한 학원의 모두가, 이 거대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한 분씩 만나서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을 때, 제일 고마워한 건 역시 도이 선생님이셨다. 1학년들 때문에 여러모로 곤란한 일을 많기 겪기도 하시고 힘들어하시기도 하지만, 역시 가장 학생들을 소중히 여기시는 분 다웠다.
더불어 선생님들은 마지막 날에 핵심적인 일을 하시게 되었다. 바로, 1학년들에게 크리스마스를 알려주고, 트리를 가져다 주신 것. 그 덕에 일이 한층 수월해지는 것 같았다. 분명히 우리끼리는 하기가 힘들었을 테니까. 6학년이 기다리는 동안 각 반의 담임 선생님께서는 각 반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트리를 가져다 두었다. 교실 맨 앞을 당당하게 차지한 세 개의 트리는 아직 장식이 없어 조금 초라했지만, 선물을 걸어두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정신없게 지나간 이 주일의 끝은, 트리에 가득 걸린 양말과 각자의 품속에 있는 선물들이었다.
센조와 몬지로가 이 반의 트리를, 쵸지와 코헤이타가 로 반의 트리를, 이사쿠와 토메사부로가 하 반의 트리를.
정성이 가득 담긴 그 선물들은 정성스럽게 포장된 채로 트리에 걸렸다.
열매마냥 가득 걸리게 된 선물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교장 선생님은 어떻게 완성되었는지 아침에 보러 오겠다고 하셨고, 선생님들도 잔뜩 기대하셨다.
창과 칼과 폭약을 들고 다니는 이곳에서는 어찌 보면 참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좋은 기억이 남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 더 행복한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트리를 하나씩 살펴보며 다들 고생했다는 말을 한 마디씩 했다. 그러고 보니, 이게 뭐라고 다들 이렇게 열심히 했담. 그러게. 너무 열정적으로 했어. 나무 깎느라 손목이 꺾이는 줄 알았단 말이다.
어쩌면 우리들이 가지지 못한 따뜻함을, 후배들은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 자, 선물이다! "